기만의 겨울잠에서 깨어나다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윈터 슬립’과 자기기만 kjdaily.com

2015년 05월 06일(수) 19:33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 지역은 환상적인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곳이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종교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만들어 살았던 이곳은 현재 호텔이나 카페로 개조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영화 ‘윈터 슬립’의 주인공 아이딘은 수십 년 째 이런 동굴에서 겨울잠 자듯 살아가고 있다. 그는 한때 이스탄불에서 연극배우를 했다지만 지금 그의 삶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호텔을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다 서재에 틀어박혀 신문에 칼럼을 쓰는 게 전부다. 같이 사는 아내와 이혼한 여동생의 안부도 가정부에게 확인할 만큼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낸다.

그런 그에게 일상의 리듬을 깨는 돌멩이가 날아온다. 그의 차에 돌팔매질을 한 소년을 집에 데려다주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적의를 내비친다. 밀린 월세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딘의 변호사가 고용한 용역깡패에 의해 TV와 냉장고를 압수당하고 이를 저지하다 폭행당했기 때문이다. 아이딘을 대변하는 매니저는 도망가다 웅덩이에 빠진 아이를 데려다주러 온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차유리 값을 변상하고 밀린 월세도 내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아이딘은 매니저와 변호사가 알아서 한 일이라며 시종일관 발뺌한다. 하지만 그는 용역을 동원해 월세를 받아내겠다는 매니저의 사전보고를 받았으며, 이런 일이 생긴 이후에도 그의 일 처리 방식을 문제 삼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딘은 엉뚱하게도 세입자를 겨냥해 ‘미학의 결핍’을 주제로 글을 쓴다. 그는 성직자인 세입자의 사회적 위치를 들먹이며 신의 종복이어야 할 사람이 이웃에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고 분개한다. 쓰레기가 뒹구는 황폐화된 마당을 방치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추위 속에서 10㎞를 걸어 찾아온 세입자의 딱한 사정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의 발냄새를 불쾌해할 뿐이다. 아이딘은 이것이 부와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도덕, 영성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행위는 가해자로서 느끼는 불쾌한 기분을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에게 비난을 화살을 돌리는 기만이다.

인간은 인과율에 의해 움직이는 사물이거나 심리적으로 결정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자연 법칙에서 벗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실현하는 존재, 원인에 따른 결과를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고 초월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자유는 불안을 야기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J-P. Sartre)는 인간이 철저히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유에서 오는 불안을 회피하는 일, 여기서 자기기만(Mauvaise foi)이 자란다.

사르트르의 문법에 따르면 아이딘은 지식인, 호텔 대표, 임대인, 남편이라는 배역을 ‘연기’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정당화한다.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도덕, 이상, 원칙도 자기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오직 남을 비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됐다. 그의 위선에 지친 아내와 여동생은 그에게 날 선 말을 던지지만 정작 아이딘은 자기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지난한 신경전 끝에 그는 이스탄불로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기차를 기다리던 그에게 전에 없던 감정이 홀연히 싹튼다. 눈 덮인 들판에 놓인 늑대의 시체와 그것을 기다리는 까마귀 무리, 자기가 쏜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토끼에게 그의 시선이 머문다. 그가 깨달은 것이 자연의 덧없음인지, 인간의 자유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독백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세 시간이 넘는 영화의 러닝 타임만큼이나 오래 지속된 긴 겨울잠에서 아이딘은 비로소 깨어난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