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남아있는 추억 한 조각 해와인문기획 시네필로 ‘스틸 앨리스’와 정체성 kjdaily.com

2015년 05월 20일(수) 19:54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기획으로 격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해와자유대학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정물화(Still life)라는 단어가 정지된(Still) 생명(life)이라는 낱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정물화에는 애초에 생명이 없는 물건이거나 한때 생명이 있었지만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영화 ‘스틸 앨리스’(Still Alice)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앨리스라는 인물(人物)이 생명 없는 정물(靜物)로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앨리스는 명문 대학에서 언어학 강의를 하는 중년의 커리어우먼이다. 그녀를 ‘가장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라고 말하는 다정한 남편은 같은 대학의 의대교수이며, 장성한 세 자녀는 법학·의학·연기 분야에서 각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막내딸의 불안정한 미래 외에 평소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없다.

유아의 언어 습득 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인간의 언어습득 능력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연구 대상으로 상정한 18개월에서 2년6개월 사이의 유아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옹알이 단계를 벗어나 어휘력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기다. 언어습득 연구는 인간의 기억과 계산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며, 의사소통의 핵심은 이러한 언어습득에 있다는 그녀의 연구결과처럼 언어는 인간의 개인화와 사회화를 동근원적으로 수행한다. 라캉(J. Lacan) 또한 욕망 대상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이상적·허구적 자아를 형성하던 유아가, 18개월 이후에는 언어와 상징의 세계로 진입해 사회의 규범과 문화의 질서를 내면화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언어습득이 개인의 정체성 정립이자 사회적 존재로의 편입이라면, 언어를 상실하는 일은 정체성 혼란과 사회적 고립을 의미할 것이다. 앨리스는 요즘 단어를 잊어버리는 일이 잦다. 말하려던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약속을 잊고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신경외과를 찾은 그녀에게 의사는 그녀가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한 종류로서, 기억력과 언어능력이 상실돼 결국에는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가벼운 건망증에서 시작한 증상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그녀는 이제 집안 화장실 위치를 찾지 못해 바지를 적시고 마는 환자가 돼버렸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는 딸의 질문에 앨리스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그녀가 잃어버렸다는 ‘나 자신’이란 내가 나 자신으로 아는 성질인 정체성을 가리킬 것이다. 정체성(identity)은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통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동일성(identity)을 의미한다. 쿤데라는 ‘정체성’이라는 소설에서 개체성과 전체성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해명한 바 있다. 개별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을 전체성에 용해시켜 정체성의 탈을 씌우는 오늘날, 우리는 전체성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황홀경에 빠지거나, 그것에 반대하며 패배감을 갖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다.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꾸려왔던 앨리스였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알츠하이머 환자로서의 정체성만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은 몇 가지 개념 틀로 간단히 규정되지 않는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가 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단어는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간명한 발화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추억 한 조각, 그것이 그녀를 그럼에도 여전히 앨리스(Still Allice)로 남게 한다.

/최송아(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