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속에서 우뚝 자리한 미륵, 그것은 행복한 세상 이루겠다는 민중의 희망 전북 김제 금산사

2015년 10월 22일(목) 19:32

대적광전 지붕선과 뒤로보이는 능선이 늘어져있고, 방등계단뒷편이 봉긋 솟아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쇼카 순례단 -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복과정에서 저지른 살생을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했다.
재위 말년에 부처님 발자취를 순례하며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펼쳤다.
아쇼카 순례단은 사찰순례를 통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예전에 빛고을 광주에서 한양 가는 길은 외길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서해안고속도로와 기찻길이 있지만, 목포-서울 간 국도 1호선을 따라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장성 갈재 고개를 넘어서면 정읍 땅이다. 가을이면 온통 세상이 누렇게 황금색으로 변하는 한반도의 곡창 징게멍게(호남평야)가 여기서부터 펼쳐진다.

1400년 전, 징게멍게 너른 들을 걷는 젊은이가 있었다. 27세 승려 진표(眞表)이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988년, 송나라 때 간행한 ‘송고승전’에는 진표가 길을 떠나게 된 것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방등계단(보물 제26호).

“백제 땅 진표율사는 어려서부터 명궁으로 사냥에 능했다. 하루는 사냥에 나섰다가 밭가에서 쉬면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꿰미에 꿰어 물에 담가놓았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사슴을 쫓다가 개구리를 잊고 귀가했다. 이듬해 봄에 우연히 사냥을 나섰는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났다. 지난해 잡은 개구리들이 꿰미에 꿰여 울고 있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다 개구리들을 일 년 동안 고통 속에 지내게 한 것이었다.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그 길로 김제 금산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진표가 734년에 출생했으니 백제가 망한 지 80여 년이 흐른 후이다. 마치 개구리의 운명이 진표 자신과 같았다. 나라는 망하고 백제땅 유민은 승전국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꿰미에 꿰여있는 백제인들은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국보 제62호 미륵전 벽면이 분별없는 이들의 낙서로 훼손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아마 진표가 즐겨찾은 사냥터는 김제 모악산(母岳山)인 듯하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 애를 안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 부른다. 어미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악산은 곳곳에 생명의 근원인 물이 시작된다. 동으로 구이저수지, 서로 금평저수지, 남으로 안덕저수지, 북으로 불선제 중인제 가마제 등 사방으로 젖줄이 나 있다. 온통 호남평야를 적시는 어머니의 젖꼭지이다.

그중에 모악산 자락 금산(金山)면과 금구(金溝)면을 흐르는 원평천, 두월천에서는 사금이 나온다. 금이 많아 땅이름도 금(金)으로 시작한 듯하다. 이곳에 자리한 사찰이어서인지 절이름도 금산사(金山寺)이다.

절 이름과 관련해서 또 다른 설이 있다. 모악산은 옛말로 ‘큰 뫼’라는 뜻을 지닌 ‘엄뫼’라고 불렀다. ‘엄뫼’는 한자로 표기하면 모악산이 되고, ‘큰 뫼’는 큼을 소리나는 대로 바꿔 금(金)으로 뫼는 산(山)으로 고쳐 금산사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진표가 출가한 금산사에 숭제(崇濟)법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구도는 쉽지 않았다. 15년이 흘러도 깨달음은 잡힐 듯 말 듯 했다.

길을 떠났다. 징게멍게 들을 지나 부안 변산의 ‘부사의 방’으로 갔다. 천 길 낭떠러지 절벽사이에 있는 작은 방장이다. 절벽 위에서 백 척이나 되는 나무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험한 곳이다. 이곳에서 미륵과 지장보살을 염하며 3년을 정진했다. 마침내 미륵보살에게 금석과 가사, 발우를 받아 출가본사 금산사로 향했다.

그 후 점찰법회를 통해 백제유민들을 제도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에 지은 업장에서 오는 것이니 선행과 정진으로 참회하고 업장을 소멸해 다음에는 복락을 누리자.”

미륵전 전경과 내부 모습.

진표는 금산사에 미륵불을 조성하고 행복한 세상이 온다는 미륵신앙을 설파했다.

불교에서 미륵(Maitreyer)은 석가모니 부처의 뒤를 이어 부처가 된다는 미래의 부처, 즉 희망이다. 진표는 미륵세상이 펼쳐지기를 염원하며 금산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했다. 이렇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로 거듭나게 됐다.

미륵신앙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출현하기 전까지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이다. 또 하나는 미래에 인간세계에 태어나 중생을 교화할 미륵불의 구원을 갈망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금산사에는 미륵상생과 하생신앙이 모두 구현돼 있다.

미륵상생 지역은 송대(松臺)로 불렸던 방등계단(方等戒壇) 구역이다.

불교에서 계단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계를 받는 장소이다. 계단은 금산사를 비롯해 양산 통도사, 개성 불일사 등 국내에도 몇 안되는 성지이다.

대부분 계단은 스님이 되는 출가자에게 계를 주는 곳으로 금강계단이라 부른다. 그런데 금산사는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출가자뿐 아니라 일반 재가자도 계를 받는다.

방등계단에는 돌로 된 종(석종형)같은 사리탑이 있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탑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의 세계이다.

방등계단 아래에 미륵전이 자리해 있다. 미륵불이 시방세계에 내려오는 하생의 영역이다.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시대를 초월해 미륵불이 하생하기를 염원했다. 호남의 민중들은 더욱 간절했다.

금산사는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로 터를 열었다. 초창 당시 사찰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762년 진표율사가 주석하면서 비로소 대가람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 후 고려 때 크게 사세를 펼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고 말았다. 임난당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승병장 뇌묵 처영스님이 금산사를 거점으로 1천여명의 승군을 조직하고 맹활약했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의 보복을 당한 것이다.

정유재란 직전의 기록에 보면 가람에는 전각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금산사는 크게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해장전, 극락전, 능인전, 문수전, 보현전, 지장수계전, 선등전 등이 대사구에 있었으나 기록에만 남아있다.

또한 봉천원구에도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도솔전, 칠성전, 왕사각 등이 있었다.

광교원구에는 보광명전, 설법전, 진표영당, 해동육조영당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 1635년 절을 중창하면서 봉천원구와 광교원구의 가람은 일체 복구되지 못하고 대사구에서도 중심 전각만이 재건되면서 현재 가람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됐다.

금산사에 자리한 국보급 문화재들. 왼쪽부터 오층석탑(보물 제25호), 석등(보물 제828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육각다층석탑물 (보물 제27호), 석련대(보물 제23호).

현재 금산사에는 국보 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해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석등(보물 제828호),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혜덕왕사탑비(보물 제24호)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야망이 좌절됐다. 935년 아들 신검에 의해 이곳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유폐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견훤이 감금되었던 곳이 미륵전이다.

혜덕왕사탑비(보물 제24호). 꼬리부분이 힘있게 위로 솟구쳐 있는 것이 고려시대 왕성했던 불교의 위상을 보여준다.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은 모악산 금산사 아래 제비산에서 대동세상을 꿈꿨다. 조선후기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도 모악산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 역시 미륵전을 성지로 삼아 모악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모두들 세상을 바꾸고 민중을 구제하고자 ‘미륵의 땅’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으로 모여든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모악산은 신흥종교의 산실이 됐다. 1927년 이후 금산면 청도리의 백운동은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면서 신흥종교 신도들이 집단이주해 전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다. 지금도 금산사 아랫녘에는 증산교, 대순진리회 등 수많은 종교인들의 본산이 자리해 교세를 펴고 있다.

진표율사는 백제유민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 법주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법을 폈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을 위해 부친을 모시고 금강산 발연사에서 희망의 씨앗을 심어줬고,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미륵전, 겉에서 보면 3층 내부는 통층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은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 등 이름이 여럿이다.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 모셔졌었다. 정유재란 이후 인조 때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하면서 소조삼존불로 봉안했다.
미륵전에는 실내에 모신 불상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인 미륵불과 협시보살 등 3구의 불상이 자리해있다. 중앙의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양족 협시보살은 8.79m이다.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모셔야하기 때문에 전각 내부는 3층의 겉모습과 달리 하나의 통층으로 이뤄졌다.
전각 바깥에는 1층에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 미륵전(彌勒殿) 등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모두가 미륵의 다른 표현이다.
대자보전은 미륵을 뜻하는 범어 Maitreya를 한자로 번역하여 자씨(慈氏)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용화지회는 미륵이 석가 입멸 후 56억7천만년이 지나 사바세계에 도래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의미이다. 즉 용화지회는 미륵의 하생을 뜻한다. 그리고 미륵전은 말 그대로 건물 안에 모셔진 미륵불의 명패이다.
미륵전 본존불은 아쉽게도 1934년 실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이 불상은 흙으로 조성한 소조불로 내부 골격은 나무로 형태를 잡았다. 불상 아래에 켜놓은 촛불이 나무에 옮겨 붙어 뼈대가 타버리자 그 자리에 고스란히 주저앉고 말았다.
미륵불 복원은 일본에서 근대 조각을 공부한 김복진(1901-1940)씨가 석고로 조성했다. ‘거대한 불상이지만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평이다. 20세기 근대 한국 조각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불리던 김복진 씨는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에도 참여했다. 이번에는 소재가 시멘트였다.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전체적인 균형을 잡았지만 재정난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김복진 씨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후 법주사 미륵대불은 1963년에 완성됐다. 시멘트로 조성한 대불도 풍화에 견디지 못해 사라지고 현재 법주사에는 청동대불이 자리해 있다.


아쇼카 순례단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11월14일(土) 경북 포항 보경사 (문의:062-383-3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