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현장에서 다가오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2016년 01월 26일(화) 18:44

태백산맥문학관 옆에 있는 소설 속 현부자네 집.

해방직후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를 다룬 소설 ‘태백산맥’은 역사서에 가깝다. 작가 조정래는 극심한 좌우대립과 친일파 중심으로 지도층이 형성되고 여전히 고통 속에 시달려야 했던 민중의 삶을 씨줄로 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맞게 허구적으로 그려낸 인물들을 날줄로 삼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오늘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무대인 보성군 벌교읍을 찾는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걷기 위해서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벌교버스터미널 옆 제석산 기슭에 마련된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에서 시작된다. 2008년 문을 연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은 과거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해 벌교읍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내고, 전시실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건축됐다.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 2008년 문을 연 문학관은 공중에 매달려있는 형상으로 건축됐다.

문학관에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작가의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다룬 소설 ‘태백산맥’이 우리 민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집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제 1전시실에는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이란 장으로 구성되고, 1만6천여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159건 719점의 기증 작품이 전시돼 있다.

태백산맥문학관 옆에는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집’이 있다. 소설에서 소화의 집은 이렇게 묘사된다. ‘조그마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에서 정찬봉의 손자 정하섭은 현부자네 전속무당 월녀의 딸 소화와 이곳 소화의 집에서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벌교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벌교역.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소설 속 묘사처럼 현부자네에서는 간척지인 넓은 중도들녘이 내려다보인다. 현부자네 집은 전체적으로 한옥의 틀을 갖추고 있으되 일본식 주택 형식이 가미됐다.

길은 소화다리로 이어진다. 소화다리는 소설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로 등장한다. 이 다리에서 여순반란사건이나 한국전쟁 때 실제로 총살이 이뤄지고, 소설 속에서도 총살장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소화다리는 오늘도 말없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맞고 있다.

우리는 벌교천변을 따라 홍교로 향한다. 벌교천은 여자만에 가깝기 때문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갯벌을 이룬다. 홍교를 건너지 않고 우리는 ‘김범우의 집’으로 간다.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의 집이다.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초등학생이던 작가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곤 했다는 사실을 소설과 결부시켜 생각하니 흥미롭다. 이 집은 소설에서 품격 있고 양심적인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 김범우는 김사용의 아들이다. 김범우는 해방직후 좌우의 극심한 갈등과 불신 속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물론 당시 중도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설 자리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남과 북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했던 안타까운 현실은 소설 속에서도 재현된다.

1728년 건축된 홍교는 현존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

김범우의 집에서 나와 다시 홍교로 들어선다. 홍교는 소화다리 안쪽 벌교천 위에 놓인 교량으로 1728년(영조 4년)에 놓여졌다. 원래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순천 선암사의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만들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도 홍교가 놓이기 전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비롯됐다. 세 칸의 벌교 홍교는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됐다.

부용산 등산로 입구에는 좌익세력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던 청년단 터가 있다. 원래는 일본식 2층 건물이었고, 1995년까지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 이 건물 2층에 염상구의 아지트였던 청년단이 들어 있었다.

이어서 벌교 금융조합 건물을 만난다.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 건물로 건립됐고, 2층 붉은색 벽돌 건물인데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전면에 크게 창이 나 있으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등장하는데, 송기묵은 돈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에게 죽고 만다.

금융조합에서 보성여관으로 가는 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중심거리인 소위 본정통으로, 지금은 소설태백산맥 문학거리로 지정돼 있다. 이런 소설태백산맥 문학거리 한 가운데에 보성여관이 위치해 있다. 소설 속에서는 남도여관으로 등장하고, 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현재 보성여관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매입해 운영하고 있어 박제된 문화재를 벗어나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을 준다.

보성여관은 소설 속 남도여관으로 토벌대가 사용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지금도 여관으로 사용된다.

보성여관을 지나 벌교역으로 향했다. 현재 벌교역은 말끔하게 단장됐지만 이곳은 벌교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혁명에 실패한 염상진의 목이 걸린 곳도 역전이며, 역 주변에 좌판을 벌리고 물건을 팔던 상인들에게 염상구가 이잣돈을 불리고 텃세를 받기도 했던 곳도 이곳 벌교 역전이었다.

벌교천에 놓인 철다리는 1930년 무렵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였다. 소설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주는 곳도 이 철다리다. 염상구는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희한한 결투를 벌인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여기에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염상구는 벌교의 주먹패를 장악하게 된다.

벌교 철다리. 염상구가 장터거리 깡패 왕초와 담력을 겨루는 결투를 벌였던 곳으로 묘사된다.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을 가슴으로 만나며 걷다보니 어느덧 처음 출발했던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에 다다랐다.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를 다룬 소설 ‘태백산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단이 계속되고,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사회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계층간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쪽지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태백산맥문학관→현부자집→회정리교회→소화다리→김범우의 집→홍교→태백산맥 문학공원→금융조합→보성여관→벌교역→철다리→중도방죽→태백산맥문학관까지 8㎞에,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벌교는 꼬막의 고장답게 꼬막정식을 하는 식당이 많다. 소화다리 근처에 꼬막정식을 하는 식당이 많고, 보성여관 앞 국일식당(061-857-0588)은 오랜 역사를 가진 식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