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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강도는 켜켜이 기억을 축적하고, 시대를 넘어선 문화를 만든다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2> 오래된 카페 ‘르 프로코프’의 잔상
‘느림’은 고통아닌 일상…속도에 중독된 삶은 또다른 구속
亞문화전당, 기억을 소비하고 창조하는 ‘문화의 숲’ 돼야

2016년 05월 12일(목) 19:26

1686년 문을 연 카페 ‘르 프로코프’. 파리 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기억해온 이곳은 현재까지 3세기가 넘도록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해 서울과 광주를 다녀왔다.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있던 호두과자점과 음식점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은 통신사 대리점과 다른 업종으로 대체돼 있었다. 1-2년 마다 한 번씩 한국에 올 때는 꼭 방문하곤 했었는데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시 공간 곳곳에서 못 보던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는 사라지거나 새로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업종으로 대체돼 있는 상점들. 내 기억 속에 있던 광주의 풍경은 짧은 시간 동안 전혀 다른 낯선 공간이 돼 버렸다. 속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 문화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짧은 부재 동안 익숙했던 곳이 사라져 버린 도시의 풍경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과 같다.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하루는 지인을 만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내게 한국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말해줬다. 밤에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에 배송해주는 쿠팡의 로켓 배송은 일하는 엄마들을 배려한 최상의 서비스라며 이들의 마케팅전략을 극찬했다. 한국은 속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선진국이다. 빠른 인터넷 속도, 퀵서비스, 배달 문화 등. 그러나 총알 배송을 위해 밤새워 일해야 하는 이들, 신속함을 칭송하는 이들의 이면에 속도전쟁을 치르기 위해 시간에 구속돼 있는 삶을 생각하니 불편해졌다. 한국사회에서 ‘느리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자 게으름이며, 경쟁에서의 실패이고 죄악과 같은 등가의 개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날 프랑스에서의 합법적 체류연장을 위해 행정관청인 경시청을 방문했다. 외국인들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 년마다 자신의 체류 연장을 위해 경시청에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 후 6시간이 지나서야 서류 제출을 마쳤다. 일 년에 한 번씩 이날이 되면, 이곳에 살면서 터득한 ‘인내와 느림의 미학’에 대한 프랑스에 대한 예찬을 취소하고 싶어진다.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일을 비효율적으로 할까?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는 외국인들이라면 느끼는 프랑스의 비합리적 행정일 것이다.

프랑스에 살다 보면 ‘느림’을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속도에 민감한 한국인으로서는 낯선 프랑스의 ‘느림’의 문화는 처음엔 고통이고 다음은 인내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느림’은 삶 속으로 파고든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상대속도가 변화하듯이, 상대가 느리게 가면 나 또한 느리게 가면 된다. 그러면 ‘느림’은 고통과 견뎌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상이 된다.

'르 프로코프' 내부<사진 위>와 뒷모습.

유럽의 많은 도시가 그러하지만, 특히 파리는 현재와 10년 전 도시 풍경 사이에서 큰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운 도시이다. 느린 프랑스인들의 성향 탓이리라! 오랜만에 방문해도 늘 익숙하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파리의 라탕 구역(Quartier Latin)에는 역사 깊은 카페가 많다. 그 중 ‘르 프로코프(Le Procope)’는 파리에서 1686년에 문을 연 가장 오래된 카페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문학가, 극작가들이 예술적 견해를 나누던 문학 카페로서 볼테르, 루소, 휴고, 라퐁텐,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또한 디드로에 의해 편찬된 백과사전(Encyclopedie)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당시 이 카페의 치열한 토론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사람들이 오랫동안 사랑하고 기억해온 ‘르 프로코프’는 현재까지 3세기가 넘도록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이곳에서 소르본 대학의 문학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르 프로코프’는 프랑스인들에게 예술인들의 만남과 글쓰기, 토론의 장소로서 문화를 대변하는 장소이다. 변화에 대한 느림의 강도만큼 시민들에 의해 공유된 이 카페의 기억은 매우 농밀하다.

문학 카페로서 천천히 진화해온 이곳의 역사는 현재화된 기억으로 축적됐고 이곳만의 문화가 됐다.

이는 문화는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이어온 기억들의 농밀한 축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됐을 때,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견고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호기심을 안고 시작한 서울의 북촌, 서촌, 경리단길 산책길에서 발견한 것은 특색 있는 문화, 휴식공간이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시 환경의 변화로 중·상류층이 도심의 낙후된 지역으로 몰리면서 지대가 상승해 비싼 임대료나 집값 등을 감당할 수 없는 원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 나가는 현상)에 의해 원래의 장소에 대한 사라진 기억들만 목격했을 뿐이다.

이곳은 ‘문화특성화’가 도시 성장 방법론으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문화경관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한 장소들이다.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오랜 시간을 두고 성장한 문화가 아니라 새롭게 이식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을까? 침체돼 있는 도시공간에 새로운 문화적 지표가 되길 희망하였지만, 빠른 변화에 이곳만의 기억과 문화는 사라지고 새로운 상업 자본만이 남게 됐다.

슬로 시티 구호를 외치며 ‘느림’의 가치를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나, ‘느림’이 우리 삶의 일상이 되기엔 우리는 속도에 너무 중독돼 있다. 어릴 적 친구와 뛰어놀던 골목길, 연인과 함께했던 카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없어진지 오래며, 추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선사한 ‘속도’는 자유도 선물했으나 결국 더 많은 자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더 빠른 노동과 더 빠른 경험만이 강요됐고, ‘속도’는 결국 또 다른 구속의 기호가 되었다. 우리는 속도를 추구하는 대신 도시공간에서 ‘기억이 축적된 장소’를 잃어버렸다. 기억이 축적될 시간도 없이 도시 곳곳에 빠르게 새로운 문화를 이식했다. 결국, 오래된 기억과 문화는 사라져 버렸다. 장소에 대한 기억과 역사, 그리고 문화 사이에는 엄청난 틈만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밀란 쿤테타가 프랑스로 망명해 쓴 첫 번째 프랑스어로 된 소설 ‘느림’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작년에 개관한 아시아문화전당은 문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아시아 공동체의 문화적 가치와 콘텐츠를 담아내야 하는 거대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더불어 침체된 구도심은 전당의 문화적 파급효과로 활력을 찾을 것이다. 문화 컨텐츠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너무 빠른 변화와 새로운 문화의 이식으로 광주의 구도심이 지닌 역사적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광주라는 터’에 광주 및 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과 문화 콘텐츠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이들의 간극이 벌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며, 기억을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재생산하며 창조할 수 있는 문화의 숲이 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