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화된 도시풍경의 슬픈 서사, 노스텔지어의 또 다른 이름 ‘골목길’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3> 파리의 파사쥬 (passage) 오래된 시간을 기억하는 탈경계적 공간

2016년 05월 19일(목) 19:00

프린스 파사쥬(passage des pinces, 1860), 유리와 철골로 덮여진 지붕의 파사쥬파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파사쥬.

현대인들에게 도시풍경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고층 아파트, 광활한 도로, 거대한 쇼핑센터, 수많은 자동차를 떠올릴 것이다. 스펙터클화된 도시의 상징이 돼버린 고층건물 숲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다. 기억 저편,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던 골목길을! 인기리에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도시개발에 의해 사라지고 없는 ‘쌍문동 골목길’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속도가 삼켜버린 ‘골목길’의 추억을 통해 과거를 그리워한다. 골목길은 잃어버린 추억의 퍼즐 조각이 됐으며, 그리움의 ‘노스텔지어’가 돼버렸다.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파리에는 우리를 현재에서 과거의 기억으로 이끌어주는 그리움의 통로, 그 통로의 길이 만큼 시간을 정지시킨 듯한 ‘파사쥬(Passage)’가 도시화의 가혹함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과거 많은 파리지엥들이 산책하고 향유했던 골목길이 아니라 이제는 구경꾼으로서의 관광객들이 많은 골목길이 됐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파사쥬는 파리지엥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밤마다 과거의 파리를 배회하듯 파사쥬를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19세기 과거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파사쥬의 탄생 - 근대적 욕망의 출구

산업혁명 이후 신세계의 상징이 된 철과 유리. 이들 재료로 만들어진 파사쥬는 19세기 파리의 도시공간을 상징하는 신건축이었다. 파사쥬는 미로처럼 뻗어 있는 도로와 건물 ‘사이의 공간’이며, 이쪽 도로와 저쪽 도로를 잇는 ‘덮개가 있는 통행로’다.

길을 사이에 두고 보도에 연이어 카페, 레스토랑, 서점, 골동품, 각종 부티끄 등이 들어서 있다. 프랑스 대혁명(1784)년 직후부터 나폴레옹 3세 통치가 시작되기 전(1853)까지 파사쥬는 파리 전역에 확산돼 시민들의 일상을 유혹했다. 오늘날 파리에는 약 30여 개의 파사쥬가 남아 있다.

파노라마 파사쥬(Passage des panoramas, 1799), 파리 최초의 파사쥬.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아래 쇼핑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유리천장으로 덮힌 파사쥬는 개방적인 공간에서 따스한 빛이 가득한 날은 빛을 만끽하고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 우산 없이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쇼핑 공간이었다. 파사쥬의 산책은 ‘윈도우 쇼핑’이라는 소비유형, 즉 ‘아이쇼핑’이라는 새로운 쇼핑유형을 탄생시켰으며, 상품의 범람을 초래하고 근대적 소비욕망을 이 세상에 출현시켰다.

저녁 무렵 가스등이 하나씩 켜지면 그곳은 환상의 세계가 된다. 온통 벽으로 막힌 실내에서 벗어나 쇼윈도우로 환상적인 내부를 드러낸 파사쥬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면서 ‘대중이 거주하는 곳’이 됐다. 이곳에서 대중은 사적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개인으로서 공적 거리 문화를 창조하는 주체로 발전했다.

쥬프루아 파사쥬(Passage des Jouffroy, 1882) 윈도우 쇼핑을 즐기고 있는 이들

■ 파사쥬의 탄생 - 망각의 정치에 의해 쇠락한 파사쥬

사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낭만의 도시 파리도 우리의 현실처럼 도시화의 폭력에 파괴돼 사라져 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적지 않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파리의 도시경관은 나폴레옹 3세(1853년)부터 실시된 오스만(E.Haussmann) 남작의 도시화 및 권력 중심화에 의한 도시개조계획으로 이뤄진 것이다. 대로를 만들고 어둡고, 좁고, 굽은 길들을 제거해 대규모 관통 도로를 만듦으로써 파사쥬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망각의 정치에 의해 많은 것들이 파괴됐더라도 옛 흔적들은 파리의 어느 곳에서 발길을 멈추더라도 우리 시선에 쉽게 포획된다. 파리 시민들은 과거의 기억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존하는 수집광적인 유전자가 있다. 그 때문일까? 옛것을 향유하는 보편적 기억들은 이들의 일상생활속에 늘 함께한다.

파리의 구역별 도시경관사진집(좌) & 1900년대 사용된 엽서 가판대(우) : 빈티지의 추종과 수집은 단순 소비대상이 아니라 이들의 일상생활이다.

■ 파사쥬의 현재성 - 반노스텔지어의 장소

파사쥬는 19세기 중반 이후, 오스만의 도시개조계획이 진행되면서 쇠퇴했지만, 현대 백화점 탄생의 도화선이 됐다. 현재 프랑스의 쇼핑몰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백화점 상점 배치와는 매우 다르다. 일반적으로 백화점은 폐쇄적인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일정 면적을 점유한 상점들이 격자형으로 배열돼 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형 쇼핑몰들 대부분은 긴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방식이다. 골목길을 산책하듯이 소비자들의 움직임과 관심을 유도하는 파사쥬의 형태와 유사하다. 처음 프랑스의 쇼핑몰을 방문할 당시, 길게 배열돼 있는 상점들 때문에 처음 시작점을 찾으려면 걸었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긴 동선때문에 이들의 비합리성을 원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사랑했던 파사쥬를 산책한 후 해결됐다. 이것 또한 걷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유전자 탓이리라.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가 파리이다. 파사쥬는 파리의 축소판이다. 우리네 삶 자체가 공간적이다. 우리가 만든 공간이 우리를 닮아가고 동시에 우리도 공간을 닮는 것처럼, 파사쥬와 파리는 서로 닮아 있다. 근대적 욕망의 출발점이었던 파사쥬. 파리시민들에게 ‘길’을 통해 산책하며 체험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없는 ‘길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아니라 현재의 일상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재생산된다. 파사쥬의 그리움은 프레임에 갇힌 노스텔지어를 뛰어 넘어 반노스텔지어의 장소로 현존한다.

■ 파사쥬의 탈경계성 - 오래된 시간을 담아내는 장소가 되다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인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파리의 파사쥬에 집착했다. 유대인 체포령이 내려진 후 미국으로 망명하려던 시도가 좌절돼, 스페인 국경에서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벤야민은 말년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그가 파리에서 망명을 지연하며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유했던 것은 근대의 상징적 재료(철, 유리)로 만들어진 새로운 건축물인 ‘파사쥬’였다. 그가 말한 대로 ‘가스등과 기름등이 타고 있을 때 파사쥬는 멋진 장소’였지만 그가 머물던 1930년대 파사쥬는 이미 쇠퇴의 길에 놓여 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파사쥬가 그의 사유의 핵심이 됐던 이유는 현대성 안에서는 사라져 버린, 그러나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 안에 존재하는 특별한 철학적 공간성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벤야민은 파사쥬의 ‘문지방 영역(schwelle)’의 특성이라고 봤다. 문지방 영역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러면서도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이분법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중간영역’ 혹은 ‘경계영역’을 의미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철과 유리로 된 지붕 구조로 덮음으로써 ’외부가 내부화’된 새로운 형태의 골목길, 파사쥬에서의 산책은 탈구획적인 경계 영역의 특이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파사쥬의 ‘문지방 영역’은 벤야민에게 당시 산업혁명 이후 이분법적 시스템으로 점철된 피폐화된 근대 사회에서 그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변혁의 공간이었다.

그는 파사쥬는 소비사회의 ‘소외’가 발생한 최초의 장소이면서, 대중의 ‘외면화된 거실’로 봤다. 이곳에서 소비문화에 열광하고 도취한 구경꾼으로서 어슬렁거리던 이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자유의지대로 헤매는 자, ‘산책자’가 됐다. 또한 그는 ‘산책자들은 거리와 실내의 중간물로서 양옆이 막힌 파사쥬에서 부르주아 실내에 있는 듯한 아늑함을 느낀다. 산책자들에게 파사쥬에 있는 상점의 간판은 살롱의 유화와 마찬가지로 벽장식이 되기도 하며, 벤치는 침대가 되고 통로는 집의 응접실이며, 이곳은 집단의 살롱으로 인식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파사쥬는 개인의 욕망의 출발점이었던 공간이지만, 구경꾼이 산책자로 성장하고 단순 통과 기능의 길은 어느덧 거실이 되고 식당, 화랑, 살롱이 되면서, 사적 개인에서 집단적 개인이 머무르는 장소, 상업, 예술, 문화가 복합된 탈경계 공간이 됐다.

19세기 골목길, 파리의 파사쥬.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파사쥬는 ‘재래시장’, ‘오래된 골목길’, ‘아케이드’의 개념으로 외연이 확장되고 변이가 이뤄졌다. 파사쥬에서 단순히 상권의 성공과 관광의 가치만을 선택적으로 읽어낸다. 파사쥬의 외형적 특성을 흉내내어 우리네 시장이나 쇼핑공간에 유리 지붕을 얹고 파사쥬의 성공 환상을 꿈꾼다. 골목길의 노스텔지어를 복제해서 과거의 시간을 재현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파사쥬’는 단순히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만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자유로운 산책자들과 소비, 예술, 문화적 교감이 과거의 시간 함께 조우하고, 기억의 흔적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골목길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골목길‘은 벤야민의 문지방영역처럼 개인의 공간이자 모두의 공간이었고 사회적 공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리움일 뿐이다. 개발보다 ‘재생’에 관심이 모이며, 허물기 일쑤였던 길들에 관심을 갖고 그림과 시를 그려넣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벤트적인 노스텔지어의 복제일 뿐이다.

재생된 길에 향유할 수 있는 주체는 없고 구경꾼만 남았다. 노스텔지어의 현재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외형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우리가 ‘길’에서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의 흔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구경꾼이 아닌 산책자로서 이 곳에서 향유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