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치 창조 ‘혼합의 축제’… 과소비에 저항하는 여유로운 투쟁의 장소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5> 프랑스의 벼룩시장

2016년 06월 22일(수) 20:14

비드 그흐니에의 여유로운 풍경.

6월이 돼도 파리의 봄은 온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목련, 벚꽃, 개나리 등 많은 봄꽃들이 피고 지었건만, 기온은 여전히 생태계의 순환을 거스르는 듯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20도가 넘다가 어느날은 10도 이하로 뚝 떨어지는 날씨는 밀당하는 연인들의 모습과 같다. 화창하다가 소나기, 다시 화창, 하루에도 여러번 변하는 프랑스의 날씨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침에 비가 온다고 해서 실망할 할 필요가 없다. 조금 지나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프랑스의 날씨는 내게 긍정의 힘을 가르쳐 준다. 처음 시작이 우울하였다 하여도 끝날 때까지 같은 고통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다시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6월 첫째 주 내내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이로 인해 파리는 백여 년만의 홍수를 경험하였고 파리 센느강과 강 하류에 있던 마을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루브르 박물관은 유물의 안전 정비를 위해 며칠 동안 휴관하였다. 장마로 인해 잦은 홍수를 경험해본 우리에게는 수위가 높아진 센느강이 신기하다고 구경하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이 더 새로워 보였다. 봄이 언제 올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건만, 장기간의 비로 봄은 또다시 몇 걸음 뒤로 도망가 버렸다. 모처럼 비가 멈춘 어느 날, 봄날의 싸늘한 바람을 가로질러 벼룩시장을 찾았다.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 과소비에 저항하고 경제적으로 살기

프랑스는 ‘시장’이 활성화된 나라이다. 마을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전통재래시장, 매일, 일주일, 한 달 등 일정한 주기로 열리는 동네의 소규모 벼룩시장부터 큰 규모의 상업화된 벼룩시장까지 많은 시장이 존재한다.

최근 몇년 사이 프랑스의 중고시장은 계속 성장 추세라고 한다. 옛것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전적 기질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고시장의 활성은 경제위기 의식뿐만 아니라 자본의 독재로 인해 사라져 버린 것들을 ‘착한 소비’ 행태로 회복시키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가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비드 그흐니에에서 부모와 함께 하는 아이들.

파리는 주말마다 열리는 생투앵(Saint-Ouen), 방브(vanves), 몽트뢰유(Montreuil) 벼룩시장이 3대 벼룩시장으로 손꼽히며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상업화됐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이외에도 크고 작은 중고품 판매시장들이 많으며 그 종류도 세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내 중고품을 판매하는 벼룩시장은 세 가지로 구별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고품을 판매하는 마쉐 오 퓌스(벼룩시장, Le march aux puces), 가치있는 골동품을 판매하는 브로깡뜨(Brocante), 집안에서 더는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 자유롭게 판매하는 비드 그흐니에(Vide Grenier)가 있다.

벼룩시장별로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다. 온갖 잡화를 파는 벼룩시장부터, 옷만을 판매하거나 혹은 식기류, 액세사리, 우표, 책 등 종류별로 특화된 곳들도 있다. 프랑스에는 이러한 벼룩시장 정보들을 알 수 있는 사이트(www.vide-grenier.org)가 있다.

그런데 비드 그흐니에(Vide Grenier) 라는 용어가 참 재미있다. Vide는 비어있는, Grenier는 창고, 다락방을 의미한다. 비드 그흐니에(Vide Grenier)는 창고를 비우는, 즉 오래된 물건들을 쌓아놓은 창고를 치운다는 은유적 의미를 지닌다. 개인의 ‘창고 대방출’이다.

비드 그흐니에 사이트에서 판매자와 소비자는 동시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

사이트를 통해 판매자는 자신의 물건을 팔고 싶은 시장과 판매할 위치를 신청하고 소비자는 어떤 종류의 벼룩시장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정보를 얻는다. 참여하는 판매자는 전문상인들부터 자신의 창고에서 안 쓰던 물건들, 책, 옷, 가구, 주방용품 등 생활용품을 가지고 나와 판매하는 마을 주민들까지 다양하다.

유명한 벼룩시장, 브로캉트, 비드 그흐니에가 열리는 일정에 맞춰, 먼 거리에서도 차를 끌고 가는 이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몇 년전부터 비드 그흐니에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러한 경향을 두고 비드 그흐니에는 ‘뒤섞이며 낭비에 저항하는 투쟁의 장’ (Les vide-greniers, lieu de m’lange et de lutte contre le gaspillage, 2010. 5.30. RUE89)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식기류, 책, 장난감을 판매 하는 가판대의 모습.

■ 좋은 소비의 교육이 이뤄지는 시장

비드 그흐니에를 가면, 한국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이 하나 있다. 집안의 물건을 팔기 위해 함께 하는 가족들이 많다는 것이다. 어린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들까지 데리고 나온 부모들.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유년시절의 기억과 흔적들이 묻어있는 물건들을 직접 판매하게 하는 부모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남자아이는 자신이 읽었음직한 동화책을 정리하고 있고 그 옆에서 여동생은 CD를 정리한다. 손님이 오니 해맑은 웃음으로 봉주흐(Bonjour!) 인사하며 맞이한다.

아이들의 앙증맞은 모습이 귀여워서인지 한 여인이 책을 사겠다고 하니, 옆에 서 있던 부모는 “자, 가방에 담아 드려야지”, “고맙습니다. 인사해야지” 가르치며, 아이는 마담에게 “메흐시 오흐부아” 인사한다. 착한 소비를 즐기는 이들이 주는 훈훈함은 6월이 지나도록 시린 봄바람에 굳어 있던 어깨 근육을 풀어주었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용하였던 물건, 혹은 집안의 소품을 판매할 때, 자녀가 직접 참여하게 한다. 물건 파는 절차를 옆에서 부모가 지도한다. 이들의 교육방식이다. 유치원에 다닐 법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건을 가방에 담고 손님에게 건네는 이 행위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이리라. 난 이들의 경제 수준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돈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물건을 팔아서 얻게 되는 하루의 총수입 크기보다 벼룩시장에서 함께 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1유로짜리 물건을 판다는 것은 1유로의 수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팔고 사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곤 한다. 벼룩시장을 돌다보면, 이러한 상투적인 듯한 아젠다가 이들의 삶속,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이들은 물건을 파는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간혹 같은 동네 주민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 서로 사는 이야기로 오후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때론 관심을 보이는 물건의 히스토리를 한참동안 열심히 풀어내는 아저씨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 사는 소박한 풍경은 올해 부쩍 추웠던 봄날 온도를 섭씨 1도쯤 올려준 듯 따사롭기만 하다.

■ 오래된 시간의 공유·개인의 서사 교환

본래 시장은 재화를 교환하는 장소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비드 그흐니에를 둘러보았을 때, ‘과연 온종일 팔면 얼마를 벌기에 이런 고생을 할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이제는 이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벼룩시장은 그 물리적 장소에 더해 시간성의 의미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이곳은 오래된 물건에 투영된 시간의 중첩과 이에 따른 개인의 서사가 함께 교환되는 장소이며, 경제적 교환과 소통을 공유하는 친목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합리적 소비가 만들어내고 있는 벼룩시장의 풍경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벼룩시장은 프랑스 시민들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있다. 쉽고 편한 대형 마트에 밀려 온기가 사라진 한국의 시장과는 온도 차가 크며, 또 침체한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맥락 없는 이벤트로 떠밀리는 전시행정도 없다.

프랑스 벼룩시장의 빠른 성장의 배경에는 과소비에 대한 거부와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며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려는 자발적인 시민의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비드 그흐니에는 모든 계층과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모이고 재활용하는 ‘좋은 소비’를 지원하는 장소이며, ‘이기적인 우리들의 시대를 가치 있게 만드는 혼합의 축제이며 소비에 저항하는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