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에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2016년 06월 30일(목) 19:03

최근 지인들과 무등산 등산을 했다. 출발 전에 함께 가는 지인들에게 등산한지도 오래 됐고 체력이 자신이 없으니 적당한 곳에 가서 얼른 돌아오자고 말은 했으나 내심 정상까지 가보면 어떨까하는 속셈도 있었다. ‘무등’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어릴 때 부터 무등산은 시골 마을 뒷산처럼 언제나 갈 수 있는 편한 산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등산을 제대로 올라본 기억이 없다. 중머리재를 몇 번 가본 것밖에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 그럼에도 왜 나는 무등산을 수십 번 올라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특정 사물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듣거나 생각을 하면 자신이 그런 행동과 생각을 하지 않았음에도 했다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을 의학적으로는 ‘공상 허언증’이라고 한다. 아마 내가 무등산에 자주 오르지 않았음에도 수십 번 오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이런 현상이지 않을까. 내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무등산 자락에서 보냈고 대학가요제를 참여하면서 싱어송라이터 생활을 할 때 ‘무등산’이란 제목으로 노래까지 만들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가슴속에 꼭꼭 숨겨진 사건이 하나 있어 무등산이 내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고 믿는다.

1980년 5·18이 끝나고 모두가 자괴감으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12월 말경에 지금은 없어진 구도청앞 문예회관에서 자작곡 발표회를 했다. 많은 5·18유족 어머니들이 오셨고 서울에서 ‘아침이슬’의 작곡자인 김민기형이 무대감독으로 참여해 주었다. 다행이 공연은 무사히 잘 마쳤고 모든 스텝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을 때 김민기형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기타를 가지고 나가자고 한다. 그날 저녁 민기형과 나는 무등산에 올랐다. 겨울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걷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 때까지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나는 답답했지만 음악적인 나의 멘토였던 형의 카리스마에 눌려 그냥 계속 무등산을 올랐다. 얼마쯤 올랐을까. 허름한 식당의 뒷방에 자리 잡은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며 음악을 얘기하고 형의 요구에 따라 나는 계속 노래했다. 대부분 나의 자작곡을 불렀던 것 같다. 중간쯤에 민기형이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씨가 며칠 전에 사형집행 됐다고 말했다. 당시 도시 빈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민기형에게는 아픈 밤이었으리라. 그 사이 눈은 엄청나게 내려 우리는 새벽까지 울며 노래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서로 부축하며 걸어 내려오면서 아침 햇살에 반짝였던 눈덮인 무등산은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그날 밤 사건으로 무등산이 내 의식 속에서 친구처럼 자리잡았음에 틀림없다. 얼마 전 무등산 산행은 예상하지 않았지만 결국 정상인 서석대까지 오르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 물론 그 후 일주일 내내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