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상상력을 가질 때 도시는 유쾌해진다 [이영미의 파리문화기행] 파리의 복합문화예술공간 (4) 버려진 철로에 세워진 창의적 공유지 ‘팝업 플레이스’

2016년 10월 26일(수) 19:04

‘그랑 트랑’ 철로 위에서 한여름을 즐기는 시민들. /출처:www.lefigaro.fr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 다양성의 도시

낭만의 도시 파리를 찾는 많은 이들은 스펙타클한 에펠탑의 야경에 반하고 화려함을 기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필자는 크지 않은 파리의 공간적 규모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파리만의 거친 매력을 느끼곤 한다.

파리는 구별로 다양한 인종과 혼합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로 특색 지어진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거주 지역으로 선호하는 15구와 16구는 부르주아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며, 13구는 중국인들과 아랍인들, 18구와 19구는 불법체류자나 이민자, 혹은 가난한 자들이 사는 구역으로 특징지어진다. 역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도시 공간의 색채와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풍경이 달라진다.

‘그랑 트랑’의 벽면 그래피티.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이 아니라 가끔은 사회적 계층이 혼합된 속살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외곽으로 나가본다. 약간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슴 속에 꼭꼭 숨긴 채….

10월 찬바람 불기 시작한 토요일 오후 유로스타와 탈리스 등 국제선이 오고 가는 북역(Gare du Nord)과 몽마르트 언덕 근처 18구에 위치한 폐선 부지로 향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행인들의 피부색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스트리트 아트를 쉽게 볼 수 있는 파리의 외곽지역의 특색답게 그래피티가 도로의 벽면을 뒤덮었다.

이곳은 2015년 ‘그라운드 컨트롤(Ground Control)’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서 2016년에는 ‘그랑 트랑(Grand Train)’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랑 트랑’의 출입구.

SNCF(프랑스 국영철도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이곳은 현재는 운영하지 않는 옛 기관차의 수리기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산업 황무지였던 이곳은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만 운영되는 팝업 플레이스로서 파리 시민에게 ‘여름날 자유와 호기심의 색다른 목적지’가 됐으며 운영조직 발표에 의하면 22주 동안 약 40만명 이상이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기차의 역사와 함께 과거 전국을 누비던 25개의 기관차가 진열돼 있는 전시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우리의 TGV 모형도 전시돼 있다. 엔진이 멈춰버린 옛 기차 칸을 개조한 8개의 레스토랑에서는 비빔밥과 같은 한국 음식부터 아시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도 마련돼 있다. 또 하늘을 지붕 삼아 휴식 취할 수 있는 오픈 바에서 맥주나 와인 한잔 마시면서 브라질 리우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기념품 샵이나 오래된 물건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방문해도 좋을 빈티지 샵 등의 쇼핑 공간, 타투(문신) 공간이 있다. 특히 선베드에 누워 쉴 수 있는 철로 위 휴식 공간은 폐선 부지만의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또 한시적으로 조성된 텃밭과 닭을 키우고 있는 조그마한 친환경 농장, 뻬땅크(petanque·프랑스 구슬치기) 등의 놀이공간이 마련돼 있어 어린아이들과 함께 오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생태체험 및 오락공간을 제공한다.

날짜별 행사를 적어놓은 안내판.

■ 자본의 논리보다-공유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공공기관

그러나 아쉽게도 ‘그랑 트랑’ 의 부지는 사실 500세대 규모의 임대주택과 유치원, 학교, 녹지공간이 조성될 예정 부지로서 내년에는 더는 이곳에서 축제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SNCF는 기존 차고지가 폐쇄된 이후 유휴공간이 돼버린 이곳을 2017년 불도저가 첫 삽을 뜨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시민에게 축제의 장소로 일시적으로 제공한 것이다. 공공 기관이 주도한 유휴공간에서 몇 해에 걸친 창의적인 축제의 경험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대주택이 건설되는 것보다 최초 ‘그라운드 컨트롤’ 프로젝트에 의해 생성됐던 이 다이나믹한 공간이 내년에도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임대주택보다는 부족한 녹지공간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도 증가하고 있어 관계기관과 어떤 식으로 협의가 이뤄질지 약간의 여지는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2017년에 18구에서 더는 ‘그랑 트랑’의 축제 현장을 볼 수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12구 리옹역 가까이 위치한 SNCF의 또 다른 폐선부지에서 2017년 축제가 열리기로 예정돼있다.

옛 차고지에 전시된 기차들.

앞으로 18구의 SNCF의 폐선부지가 어떤 방향으로 결정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프랑스 공공 기관의 창의적 노력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자체나 공공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공유지는 다른 용도로 개발되기 이전까지 방치된 경우가 허다하다. 정부는 공공이 소유한 땅을 대기업 자본에는 쉽게 제공하지만, 시민이 공유할 기회 제공에는 인색하다.

우리 사회도 폐선이나 산업 유휴지를 공공에 환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경의선 6.3㎞의 지상 구간은 공원화 됐지만 행복주택 등 임대주택이 계획됐다가 대기업 자본에 넘어갔다.

광주시의 폐선 부지는 오랜 세월 시민단체들의 노력 끝에 힘들게 공공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땅 혹은 개발 예정지에는 출입금지나 경작금지 등의 경고문과 함께 주변 도시 공간과의 고립된 경계를 만들어 내는 우리 공공 기관의 폐쇄적인 모습과 달리, 프랑스는 이들이 앞서서 유휴공지를 축제의 공간으로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도시 공간을 자본의 권력에 예속시키지 않고 지역공동체에 환원해주는 모습에서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도시 공간을 어떻게 바꿔놨는지 반성하게 한다.

▶‘그랑 트랑’의 여러 공간. /출처:www.oopsie.fr

■ 권력에 창의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공공 기관은 어떤 모습인가? 저렴하게 제공되는 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스에서 공공 기관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규제와 검열, 민과 관의 협력 사업에서 민간의 자율이 보장되지 않는 터전에서 공공 기관은 권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버려진 공간을 찾아 주민이나 예술가들이 공유의 가치를 실현하며 활기찬 공간으로 변화시켜도 개발이란 명목으로 이들을 내쫓는 것도 공공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슬프게도 우리는 공권력이 보호해주는 경험을 겪어 본 적이 많지 않다. 실정이 이러다 보니 공공 기관 주도 사업일 경우 그들을 바라보는 색안경을 끼는 것은 본능적일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연재해온 ‘LE 104’,‘호베르네 집(Chez Robert)’,‘레 프리고(Les Frigo)’, ‘그랑 트랑(Grand Train)’의 복합문화공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공공 기관의 역할이다. 19구에 위치한 도시 슬럼가에 사업 초기부터 지역 주민들을 동참시키기 위한 파리시 노력으로 문화공동체로 탄생한 ‘LE 104’, 예술가들이 유쾌한 상상력으로 불범 점거(Squat)했던 건물을 파리시가 사들여 이들에게 다시 무상으로 임대하면서 명소가 된 ‘호베르네 집’, 냉동창고를 불범점거하면서 이어온 예술가들의 레지던스를 세입자협회 등의 기관이 나서서 철거 위기를 막아주고 이후 파리시가 건물을 사들여 이들의 활동을 보호해준 ‘레 프리고’는 모두 공적 기관이 ‘공유의 가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것은 공공 기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국 문화계에 화두를 던져준다. 자, 우리도 이제 공공 기관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좀 더 아래로 내려와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유쾌하게 변할지 기대하고 싶다. 그리고 외쳐본다. “권력이여, 상상력을 발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