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 은빛 억새가 함께 그려낸 풍경화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호반낭만길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2016년 12월 27일(화) 19:31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 20m 앞에 억새가 피어 눈썹모양을 한 섬이 절경을 이룬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가도 즐겁고 가슴 설렌다. 쳇바퀴 도는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게다가 우리는 여행을 통하여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고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문화유적까지 만날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목적지는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호반낭만길이다. 호반낭만길이 시작되는 말뫼마을에 도착하자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마산동삼거리에서 호숫가로 내려가 호반 오솔길을 걷기 시작한다. 호반에는 은빛 억새가 출렁이고, 억새 너머로 호수가 드넓게 펼쳐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에는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역광으로 비친 산과 호수, 호수 속의 섬들이 은빛 억새와 함께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호수를 둘러싼 산봉우리들은 대청호를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고, 호수는 산봉우리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해준다. 이렇게 산과 호수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말없이 보듬어준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호수와 억새, 숲을 만나면서 걸을 수 있는 인기있는 코스다.

호반낭만길은 잠시 도로변을 따르기도 하지만 주로 호숫가 완만한 흙길을 따라 걷게 돼 있다. 산자락에서는 마을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다. 1980년 대청다목적댐이 완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 아래로 보이는 호수에는 논과 밭, 마을이 있었다. 유현하게 흐르던 강물은 이제 드넓은 호수가 되었다.

호반은 리아스식 해안처럼 산줄기를 호수 쪽으로 내밀었다가 안쪽으로 들어오곤 한다. 길을 걷다보면 넓은 호수 너머로 건너편 산줄기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앞산과 뒷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첩첩하고, 첩첩한 봉우리들이 잔잔한 호수위에 그림자를 비쳐 또 하나의 산을 만들어놨다. 호수 위에서는 드문드문 작은 섬들이 떠 있다. 마치 다도해를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수묵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우리는 호숫가에 앉아 아름답고 평화로운 호수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느새 우리도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워진다.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보지만 잠시 파장을 일으킬 뿐 물결은 금방 잔잔해진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리라. 마음이 넓고 평화로우면 역경이 닥쳐도 잠시 흔들릴 뿐 곧바로 평상심을 되찾아간다.

호수와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에는 부드럽게 모래톱이 형성돼 곡선을 그린다. 호숫가 얕은 물과 만나는 모래톱을 나무들이 바라보며 행복해한다. 가끔 새들이 날아와 호수에 날개를 적시고는 나무 위로 날아가곤 한다. 호수 안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대청호와 호수 주변에서는 수많은 생물과 무생물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넓은 억새밭이 있고 여러 동식물이 서식하는 추동습지는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뱀이 기어가듯 산자락이 가늘게 호수 안으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가니 산자락이 끝나는 지점 20m 앞쪽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다. 이 섬은 수량이 적어 물이 빠지면 우리가 서 있는 이곳과 연결된다. 섬에는 억새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가운데에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섬 양쪽으로 억새가 피어있는 모양이 붕긋해 하얀 눈썹 같아 보인다. 눈썹같이 보이는 섬 뒤로 또 하나의 작은 섬이 있어 화룡점정이 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지척에 있는 ‘슬픈연가’ 촬영지가 유혹한다. 둔덕에 있는 촬영지에 도착하니 대청호가 앞마당 같다. 이곳에는 2005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슬픈연가’ 촬영지로 남녀주인공인 준영과 혜인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추억이 담긴 오두막집이 있었다. 이곳 촬영지에서는 방금 봤던 눈썹 모양의 섬이 다른 모양으로 바라보인다.

우리는 ‘슬픈연가’ 촬영지를 나와 호숫가 오솔길을 걷는다. 길 위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이 온몸을 훈훈하게 해주고, S자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이 함께 걷는 사람들을 더욱 다정하게 해준다. 자연은 사람을 보듬어주고, 자연의 품에 안긴 사람들은 서로 끈끈해진다.

억새길을 걷다가 숲길로 들어서니 낙엽이 푹신하다.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때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낙엽은 인간에게 자신을 성찰하게 해준다. 사람에게 죽음이 있어 삶을 삶답게 하듯이 활엽수에게는 늦가을 낙엽 떨어지고 나목 상태로 겨울을 나는 기간이 있기에 의연하고 단단해진다.

숲길을 지나면 억새밭이 나오고, 억새밭 옆에는 어김없이 호수물이 출렁인다. 그리고 드넓게 억새군락이 펼쳐진다. 추동습지라 불리는 이곳은 2008년 대전시에 의해 ‘추동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추동습지에는 천연기념물 제330호인 수달을 비롯해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과 멸종위기종인 말똥가리·흰목물떼새·맹꽁이 등이 서식한다. 갈대와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추동습지에는 버드나무 몇 그루가 군계일학처럼 서 있고, 그밖에도 느릅나무·족제비싸리·비수리·며느리배꼽 등이 자라고 있다. 추동습지에 핀 은빛 억새와 대청호의 푸른 물이 색상의 대비를 이루고, 잔잔한 호수와 붕긋붕긋 솟은 산봉우리들이 단짝을 이룬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도로를 건너 추동마을과 대청호자연생태관을 거쳐 대청호자연생태공원으로 돌아 나오게 돼 있다.

잠시 도로를 따라 걷다가 호숫가 둔덕길로 들어선다. 호수 곁으로 바짝 다가서니 푸른 호수가 말없이 미소를 띠워준다. 푸른 하늘과 호수는 누가 더 푸르나 경쟁을 하는 것 같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면 조금 전 지나왔던, 산자락에 감싸인 추동습지와 추동마을이 잘 가라고 손짓을 해준다.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연꽃마을이라 불리는 예술인촌이 나온다. 길가에는 나무 판에 붓글씨로 쓴 여러 시인의 시들이 전시돼 있다. 이 마을에는 민가를 개조한 화가의 화실도 있다. 연꽃마을은 마을명이 아니고 연꽃을 재배하는 집 이름이다. 연꽃마을에는 여름이면 2천여평에 이르는 대지에 100여종의 연꽃이 핀다.

작은 나룻배에서 낚시하는 강태공도 이미 호수와 하나가 되었다. 신선바위가 있는 봉우리 아래쪽 호숫가에 도착하자 오늘 트레킹의 종점인 신상교라는 다리가 바로 앞에 와 있다. 이곳은 금강 본류를 제외하면 대청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길이다. 오늘의 종점인 신상교에서 대청호를 바라본다. 대청호는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답다.


※여행쪽지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대전시 동구 마산동삼거리→‘슬픈연가’ 촬영지→추동습지→대청호자연생태관→황새바위→연꽃마을→금성마을삼거리→신상교까지 10㎞ 거리에 4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서대전JC→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산내JC→대전통영고속도로 판암IC→옥천방향으로 우회전 후 2㎞ 이동→비룡삼거리에서 좌회전해 7.2㎞ 이동하면 마산동삼거리
▶대청호 주변에는 식당들이 많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에 있는 여러 식당 중에서도 연꽃마을 근처의 민물매운탕(붕어, 빠가 등)을 하는 샘골농장식당(042-274-8537)과 추동습지 근처의 오리고기를 취급하는 가래울(042-274-2023)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