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폐해진 고향으로 가는길 ‘관촌수필’ 이문구 지음 문학과지성사 1만1천원 |
| 2017년 01월 22일(일)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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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추억이 가득했던 장소들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어김없이 사라지고 초라한 시골집들만 민낯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개발업자들의 토지매수를 둘러싼 농간으로 마을의 인심은 흉흉하게 변했다.
평생을 농사일에 치여 살았던 부모님은 백발의 노인이 되셨고, 형제자매들은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늘 애틋한 마음뿐이고, 함께 놀던 깨복쟁이 친구들은 소식이 끊긴지 오래됐다.
내 어린 시절 순수한 영혼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는 더 이상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다.
곧 다가올 설날에는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대신해 늙은 아버지 홀로 마을 어귀에서 자식들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도연명 시인은 ‘귀거래사’를 통해서 벼슬을 내려놓고 떠나는 심정과 고향의 그리움을 밝히고 있다.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은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어찌 홀로 근심하고 슬퍼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이처럼 고향은 지친 심신을 위로를 해주는 최후의 마음의 안식처다.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은 1970년대에 발표된 8편의 연작 소설이다.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는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여전히 양반의식에 사로잡혀 살던 비루한 가문의 몰락과 산업화에 따른 농촌의 피폐화를 담고 있다.
주인공의 유년시절 겪었던 할아버지의 옛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완고함과 아버지의 좌익 활동에 따른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서예 교육을 받다가 심한 수치와 모멸을 당한 기억이 자신을 글씨 공부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독재정권에서는 양력설을 강요하지만 관촌마을에서는 양력설을 ‘왜놈의 설’이라고 무시하고 여전히 음력설을 전통적인 가치로 여기고 따른다.
화무십일(花無十日)에서는 6·25 한국전쟁에 따른 비극의 실상을 담고 있다. 이북에서 살던 윤 영감네 일가가 전쟁을 피해서 관촌부락으로 피난을 온다. 윤 영감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한 끼에 밥 두 그릇씩만 달라고 하고 주인공 집 머슴을 자처한다. 하지만 얼굴이 반반했던 윤 영감의 며느리가 읍내 여관에서 일을 하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이 와중에 강제징집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아들이 찾아오고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면서 두 사람의 다툼이 거듭된다. 끝내 며느리는 여관에서 눈 맞은 사내와 야반도주하고 아들은 자살한다. 윤 영감은 도망간 며느리와 손자를 찾아 서울로 향한다.
행운유수(行雲流水)에서는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고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마음의 벗이 돼준 옹점이와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녀는 엿장수하고 엿치기를 해서 이긴 엿과 움쌀을 모아 몰래 바꾼 과자 부스러기를 나눠주곤 했다.
하지만 남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유골만 돌아오자 이에 충격을 받고 마을을 떠난다. 한참 후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다.
녹수청산(綠水靑山)에서는 주인공보다 여남은 살이 많았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대복이의 사연이다. 그 당시 대복이는 미군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고 끝내는 소도둑질로 잡혀 구속된다.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인민군을 돕고, 국방군이 다시 들어오자 태극기를 들었다. 이때 대복이는 좌익활동을 했던 순심이를 돕기 위해 일부러 참봉집 머슴을 자처한다. 대복이가 국군으로 징집돼 떠나던 날 임신한 순심이가 그를 배웅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다.
소설 속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의 배경이 되는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사회적 체제를 변화시키고, 관촌마을 사람들 역시 이러한 풍랑에 휩쓸려 아픈 사연을 토해내고 있다.
이문구 작가는 지금의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농촌 공동체의 몰락을 예상 했던 것 같다.
현재 우리의 농촌은 젊은이들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사는 곳으로 전락했고, 그리움과 추억의 꿈을 잉태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황폐해진 고향으로 향하는 설날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