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 [류재준 박사의 책으로 세상읽기]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지음 창비 8천원 |
| 2017년 03월 12일(일) 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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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뿌리 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영향으로 직업에 따른 편견이 심한 편이다. 이로 인해 일부 특정 직업군에 관심이 쏠리는 편이다.
특히 IMF사태와 이후 경제적 저성장과 고용불안이 심화되면서 유독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실정이다.
한때 필자는 직장을 잃고 실업자 신세로 전락해 말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일단 직장이 없을 경우 가족의 과도한 걱정과 우려 때문에 집에서 편히 쉴 수가 없다. 하루종일 거리를 배회하거나 울적한 마음을 괜한 술로 대신했다. 결국에는 장기적인 비전이나 계획없이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기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했다.
제목 ‘레디메이드 인생’을 달리 해석하면 ‘임자 없는 기성품 인생’이라는 뜻으로 채만식 특유의 뒤틀린 식민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가득하다. 소설은 일제강점기 배경으로 1934년 5월부터 7월까지 3회에 걸쳐 ‘신동아’에 연재된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서 암울하고 왜곡된 사회에 사는 지식인들의 불안한 자의식과 무기력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 P가 신문사 K사장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부탁하는 주인공에게 사장은 도시에서 월급 생활을 하기보다는 농촌에서 일하길 권한다.
이에 P는 괘씸하고 욱하는 심정으로 “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의 근본 원인이 기역 니은 모른다든가 생활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조선의 지식 청년들이 모다 그런 인도주의자가 되여집니까?” K사장에게 오히려 반문한다.
이 와중에 만난 편집국장을 통해서 사장이 신문사가 구제 기관이 아니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다.
소설은 비록 1934년의 고달픈 생활과 사회상을 담고 있지만 현재 우리 고학력 실업의 문제점을 주인공의 넋두리를 통해서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지식계급을 대량으로 주문했다.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차라리 인텔리가 아니됐으면 노동자가 됐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쳐진 무직 인텔리다.’
어느날 주인공 친구들 중 한명의 법률책을 전당포에 잡히고 받은 돈 6원으로 사창가에 가서 술을 마신다.
주인공은 열여덟 먹은 여자와 짝을 이룬다. 그 여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자고 가라고 애원한다.
그녀가 50전도, 아니 20전도 좋다는 말에 격분해 주머니 속에 있는 전 재산 3원을 방바닥에 홱 던지고 뛰어나온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세상이 돈이면 다 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도덕적 퇴락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괴로워한다.
주인공에게는 몇 해 전 헤어진 아내와의 사이에 9살 창선이라는 아들이 있다. 그의 형이 작년에 보통학교에 입학시켰지만 월사금과 학비를 대지 못해 중도에 그만둔 상태였다.
그러한 아들을 공부시켜 인텔리를 만들기 보다는 인쇄소에 취직시키기로 결심한다.
인쇄소에 맡기고 안 내키는 발길을 돌이켜 나오면서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렸구나” 혼자 중얼거린다.
지난해 우리나라 청년 실업률은 10.7%로 2000년 이후 가장 높았다. 특히 취업난의 장기화로 일하지도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15-34세 청년 무직자를 의미하는 니트족(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 138만명에 달했다.
사람마다 직업을 가지는 이유와 목적이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생계유지나 자아실현, 사회적 출세여부를 떠나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꼭 필요하다.
이와 관련 ‘맹자’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라는 말을 했다. 즉 일정한 생업(恒産)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恒心)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