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롤’로 위로받은 한국여성들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사장 ssnam48@kjdaily.com

2017년 03월 15일(수) 20:22

지난 5개월간 우리나라 일하는 여성들은 참 난감했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직에 오를때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한껏 올라갈 것 같았다. 그러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고 최순실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역시 여성은 한계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일하는 여성들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박 전 대통령 취임 초기만해도 양성평등, 여성복지 등 기대가 컸지만 결국 시간제일자리만 늘린 경력단절여성대책 등 허울뿐인 정책만 양산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재임기간 동안 여성대통령이 여성을 외면했다는 자괴감에다 세월호 7시간 의혹을 들추는 과정에서 그 급한 시간에 머리손질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성들은 다시 한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던 날, 여성들의 부끄러움은 헤어롤 하나로 반전되었다. 10일 탄핵을 결정하던날,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일찍 출근하면서 머리 위에 핑크색 헤어롤 두개를 얹고 나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0일 오전 7시50분쯤 헌재에 도착한 이 대행은 전날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보냈다고 한다. 역사적인 선고를 앞두고 출근 전까지 결정문을 다듬었다고 한다. 이런 극한 긴장감 속에 머리 뒤쪽 잘 안보이는 헤어롤 두개를 빼는 것을 깜빡하고 출근한 것이다. 헌재는 ‘어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아침에 정신없이 나오다보니 머리도 헝클어지고 엉망이었다’고 전했다.

이정미 전 재판관은 언론에 그 사진이 보도되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은 열광했다. 외신은 더 극찬했다. 미국 AP통신은 ‘한국인 여성 재판관이 자기 일에 헌신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외신은 세월호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머리손질 하느라 현장에 늦게 나타난 것을 지적하며 ‘이 권한대행의 모습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됐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 전 재판관의 모습은 여성 직장인의 삶에 숨겨진 ‘꾸밈 노동’을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고정관념에 균열을 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나영 교수는 “그 동안 우리사회는 외적으로 ‘준비된 여성’만이 업무를 잘 해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전 재판관은 ‘다소 헝클어지고 자연스러운 모습의 여성도 얼마든지 자신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고 지적했다.

‘헤어롤 사건’ 이후 필자가 만난 일하는 여성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필자만 해도 아침은 전쟁이다. 직장과 학교에 가는 가족들 아침을 챙겨주면서 머리를 감고 헤어롤을 한 채 화장을 한다. 헤어롤은 바쁜 여성이 간편하게 머리관리를 하는 도구로 1970년대부터 널리 사용됐다. 가격은 천 원 남짓이고, 세팅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전문가의 손길이 아닌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지도자가 다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외모에 올인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정미 재판관처럼 자기 일에 전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 헤어롤이 말해줬다. 외신이 한국여성리더십을 다시 평가하는 대목이다. 이정미 전 재판관이 일에 집중해 외모 관리를 잊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일하는 여성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 점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진정한 리더는 외모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사람보다 자기 일, 자기 책임에 충실한 사람이다. 13일 그 헤어롤의 주인공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30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퇴임했다. 한국 헌정 사상 처음 대통령 탄핵 재판을 이끈 그는 퇴임사에서 헌법과 법치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를 다시 역설했다. 이 권한대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을 놓고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면서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절차를 진행하면서 헌법의 정신을 구현해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올 때 “진실은 밝혀진다”면서 마치 거짓에 근거해 탄핵된 양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인 셈이다. 그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는 춘추전국시대 <한비자>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어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주의, 그 요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며 “분열과 반목을 떨쳐내고 사랑과 포용으로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화려한 수식어로 꾸며진 인사말보다 울림이 컸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그는 헌법 가치에 천착했고, 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보여줬다. 헌법재판소 역대 최연소이자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인 이 권한대행은 현재 헌법재판관 중 사법시험 기수도 가장 낮다. 또 첫 대통령 파면이라는 엄중한 사건이 주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만장일치 결론을 도출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파면당한 첫 여성대통령에게 받은 상처를 그날 바로 치유해준 이정미 전 재판관, 참 고맙다.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