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서천 천년솔바람길 솔향기 그윽한 길 ‘선비의 기개’ 스며있어

2017년 05월 23일(화) 19:05

서천 솔바람길을 한 바퀴 돌고나면 소나무숲 사이로 문헌서원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광주에서 서해안고속도를 따라 달리다가 금강을 건너면 충청남도 서천 땅에 닿는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낮은 산과 들판이 부드럽고 평화롭다. 높지 않은 산은 마을이 둥지를 틀 터전을 마련해주고, 마을 앞 농경지는 사람들이 살아갈 양식을 제공한다. 부드러운 산을 바라보며 우리는 천년솔바람길이 시작되는 문헌서원으로 향한다. 어머니 품속 같은 안온한 골짜기로 들어서자 문헌서원이 기다리고 있다. 길은 우리를 홍살문으로 인도한다. 홍살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에 네모진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경현루라는 이름의 사각누각이 연못과 어울려있다. 여름철이면 연꽃이 예쁘게 피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홍살문을 지나 푸른 잔디밭을 따라가니 외삼문인 진수문이 일행을 맞이한다. 진수문을 통과하자 정면에 강학공간인 진수당(進修堂)이, 진수당 앞 양쪽에 유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진수당 마루 안쪽에 문헌서원(文獻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헌서원 전경. 문헌서원은 산줄기가 삼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문헌서원은 고려말 대학자인 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효정사라는 사우를 지으면서 출발했다. 효정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져 1610년에 복원했고, 이듬해 광해군이 문헌서원라고 사액했다.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고, 이후 1969년 지방 유림들이 이색선생 묘소 아래 현재의 위치에 복원했다. 문헌서원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2012-2013년 문헌서원 전통 역사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서원건물을 중건하면서부터다.

진수당 뒤쪽 계단위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는 사당인 효정사(孝靖祠)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진수당과 효정사가 문헌서원의 중심공간이라고 한다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영모재와 교육관, 문집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을 나가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목은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당(影堂)이 있다.

문헌서원은 산줄기가 삼면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문헌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근엄한 자태의 소나무들이 서원의 품격을 더욱 높여준다. 목은 이색은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목은 이색은 이성계가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 출사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고사했다.

문헌서원의 강학공간인 진수당. 문헌서원은 고려 말 대학자인 이곡과 이색 부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문헌서원 옆에는 넓고 길게 잔디가 깔려있고, 잔디밭 위쪽에 이색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 태조의 벼슬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사양하고 이곳 한산과 경기도 여주를 오가며 은둔생활을 하던 이색은 69세의 나이에 여주 신륵사 근처 여강에서 사망했다. 여주에서 생을 마감한 목은을 그의 셋째 아들 종선이 기린산 아래 지금의 자리로 모셨다. 묘지는 기린봉 아래에서 기린이 내려앉아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색의 묘 자리는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줬다.

우리는 목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목은 묘소 옆 산길로 접어들자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숲속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윽한 솔향기를 전해준다. 우리 모두 금방 숲속의 일원이 된다. 숲과 사람이 둘이 아닌 하나(不二)가 된 것이다.

문헌서원에서 600m 정도 오르니 기린봉이다. 기린봉은 해발 146ｍ 높이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지만, 이곳에 서면 서천군 한산면 소재지와 주변의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더 멀리는 금강과 금강변에 있는 익산의 웅포까지도 조망이 된다. 한산면 소재지를 감싸고 있는 건지산이 이곳 기린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봉서사 뒷산에 있는 건지산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라는 학설이 있다.

기린봉을 지나니 ‘문헌서원 옛터’로 가는 이정표가 서 있다. 솔숲 길을 지나자 대숲이 나오고, 잠시 대숲을 지나자 몇 채의 가옥이 나온다. 천년솔바람길은 죽동마을을 거쳐 이상재선생 생가터로 이어진다. 종지리 마을에 도착하니 월남 이상재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조선후기 사회운동가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민중계몽에 앞장섰고, 일제에 투쟁하기 위해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형성한 신간회 창립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이상재 선생 생가터에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봉서사로 향한다. 들판은 높지 않은 기린봉과 건지산이 감싸고 있고, 이들 산자락에 마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봉서사로 가는 길은 호암리 마을 위쪽의 포장된 도로를 따르게 돼 있다. 신록의 싱그러운 기운을 머금고 건지사로 들어선다.

봉서사는 일주문을 대신해 500년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는 중생을 맞이한다. 느티나무 문을 통과하자 아담한 모양의 극락보전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봉서사는 이상재선생이 소년시절에 공부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극락보전·삼성각·심검당·요사채 등으로 구성된 봉서사는 조용하고 아담한 절이다. 극락보전으로 들어서니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751호)이 봉안돼 있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1619년이라는 제작연대와 조각가, 시주자 등이 기록돼 있다.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는데, 산신각 앞에서는 바깥세상이 아름답게 바라보인다.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터. 이상재는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일주문 격인 느티나무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니 건지산성이 나온다. 건지산성은 임천 성흥산성과 함께 금강 하류 수륙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 이곳 건지산성이라는 학설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듯 성내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수습된 적이 있다.

건지산성을 따라 올라가니 건지산 정상이다. 정상이라고 해봐야 해발 170m에 불과하다. 정상에는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팔각정이 설치돼 있다. 팔각정에 올라서니 한산면 소재지와 주변의 넓은 들판이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동쪽 멀리 금강이 모습을 드러내고 금강 뒤로 전북 익산의 함라산 줄기기가 길게 이어진다.

건지산 정상에서 올라왔던 건지산성을 따라 내려가니 봉서사에서 영모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이른다. 여기에서 산성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문헌서원으로 향한다. 솔숲 사이로 문헌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나무 숲을 벗어나자 문헌서원이 정갈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제법 큰 규모의 서원이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여행 쪽지

▶서천 천년솔바람길은 문헌서원→기린봉→죽촌저수지→죽동마을회관→이상재 선생 생가터→호암리→봉서사→건지산성→문헌서원까지 원점으로 회귀한다. 거리는 10㎞로, 걷는데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동서천JC→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IC→교차로에서 부여·청양방면으로 좌회전→광암삼거리에서 한산방향으로 우회전→문헌서원 방면으로 우회전→문헌서원 주차장
▶문헌서원에서 자동차로 7-8분 거리에 있는 한산모시관 건너편의 담쟁이넝쿨가든(041-951-9288)은 서천군이 지정한 맛집이다. 모시된장찌개·묵은지김치찌개(7천원), 토종닭(4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