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연이 끊긴 편지 한 통 황옥주 수필 |
| 2017년 06월 01일(목)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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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산골짜기에의 한 빈집 앞에 선 채 한참이나 발길을 떼지 못했다. 태풍 한 번이면 쓰러질 것 같은, ‘전설의 고향’에 딱 어울릴 그런 집이었다.
빈집이 다 그렇듯 그 좁은 뜰에도 잡초들이 무성했다. 제 세상 만난 듯 설쳐대는 개망초들의 키 자랑이 참으로 야살스러웠다. 대밭에서 기어 나온 칡넝쿨이며 이름 모를 줄기들이 얽혀 토방까지 기웃거린다. 타는 듯한 가뭄 속에서도 앞을 향해 기어가는 끈질긴 집념이 가상하다.
장독대 자리었을 돌 틈새에 파리하게 여윈 봉선화 몇 그루가 애잔한 꽃송이를 달고 있다. 잡풀에 시달리며 혼자피고 혼자 사라질 꽃, 내년에 다시 피리라는 보장도 없다. 주변의 풀들을 뽑아주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만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설령 풀 몇 포기 없앤다고 영광의 번성기를 되찾을 것도 아닐 것, 쇠락을 앞둔 모습이 마냥 안쓰럽다.
좁은 길이며 가파른 언덕배기, 답답한 공간, 구석이 헐린 낮은 담도 막돌로 쌓아 조잡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렇듯 옹삭스럽다.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었다면 그는 이미 가진 자다.
그러나 산협(山峽)에 붙어 있어도 청솔바람이 자유롭고, 월광이 쏟아지는 밤이면 앞산 산비둘기 울음소리에 잠들기가 편했을 곳이다. 햇살이 창살 앞에서 소란을 피울 때까지의 꿈속은 늘 행복 했으리라.
사람들은 편한 삶을 누려보려는 희망으로 옛집을 버린다. 때로는 어쩌지 못해 고향을 등질 때도 있다. 나도 어렸을 적 아버지의 종교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 살던 집을 뒤에 두고 돌아설 때의 솟구친 눈물의 쓰림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챙겨갈 수가 없어 남겨진 집이니 유불여무(有不如無)다. 살지 못할 집은 실체가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부여대하고 떠나온 실향민들의 아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면 어느 누가 고향을 뜰까!
이 집도 한 때는 어린애들의 발자국소리가 소란스러웠을 것이며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혼불이 나갔던 집, 혼불 따라 하늘로 올랐던 영은 서럽던 그 날을 잊지 못하고 해마다 찾아오곤 했을 것이다.
이제는 영(靈)을 맞이해줄 사람도, 잔 올릴 손도, 잠시 쉬고 갈 돗자리도 없으니, 혼은 허공이나 떠돌다 먼 데 닭 울음소리에 황급히 돌아갔을 것이다. 사람 그림자 없는 빈집은 그래서 슬프다.
지번(地番)은 무인도도 바위산에도 있다. 빈집의 쪽문 녹슨 양철함 속에 한 통의 편지(?) 끝이 누렇게 드러나 보인다. 바르게 적혀진 주소를 찾아왔을 것이다. 비바람에 젖고 마르기 몇 날 몇 번, 속 글씨인들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지가 않다.
잠시 서서 바라보니 만감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읽혀질 날 기약 없이 빈집이나 지킬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지 않았어야 할 편지다. 발신인이 직접 찾아왔대도 발길 끊어진 집에서 뉘와 더불어 편지의 뒷얘기를 이어볼 수가 있었으랴.
공연히 사연도 궁금했다. 피곤한 몸을 다스리기 힘든 자식이 부모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적었을까? 작은 아파트가 생겼으니 올라오라는 얘길 담았을까? 부모 생각하는 자식이라면 편지 보다 발길이 먼저 닿았어야 옳다. 아니라면 세금 독촉장이라도 들어있을까? 상상의 실타래가 멋대로 머릿속을 누빈다.
날마다 해는 어김없이 부상(扶桑)에 오르고, 우연(?淵 전설에서 해가 지는 곳이라 전해진 곳)에 잠긴다. 세월의 모습이고 그림자다. 가고 돌아오지 않은 무상함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빼앗으려 드는데 풍상이 섞바뀌어 몰아칠 어느 날이면 집도, 사립도, 편지도,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갑자기 풀숲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기어 나와 기겁하듯 놀랐다. 더러는 밥도 얻어먹었을 것, 이 집의 업이라는 듯 걸음걸이가 의젓하다. 간헐적으로 수런수런 소슬한 바람이 주변의 존재하는 것 하나하나에 입술을 스치고 지난다.
발길을 떼는데 남쪽 산 너머 고향하늘, 고향집이 그리웠다. 그 대문 틈에도 한번쯤 나를 기다리는 편지가 놓인 적 있었을까?
인연은 만남으로 쌓이는 것, 연이 없으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살아도 영원한 타인으로 끝난다. 어찌 사람의 연이 마음만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랴. 오고감이 뜸해지면 끈끈했던 정도 사위어 가는데 연을 잇지 못한 편지(?) 한 통, 석양빛에 홀로 외롭다.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현 광주수필문학회 회장. 일어논문 ‘吾輩は猫である論’(夏目漱石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작품론), 수필집 ‘하얀 귀밑 머리’, 에세이집 ‘기살리기의 허상’ 등 기타 번역 일어 수필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