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시간의 섬 박영덕 수필

2017년 06월 15일(목) 19:08

고개는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기울였다. 시선은 딱히 바다 쪽이랄 수도 없고 하늘 쪽이랄 수도 없는 막연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가만, 자세히 보니 그 남자의 시선은 밖의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떠도는 몽상에 실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래된 사진이라 흐려서 확실하게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곧추세운 어깨와 반듯한 허리가 아직 중년이 채 안 된 젊은이로 보인다.

후배 란이는 가족들의 사진을 항상 지갑에 넣고 다닌다. 아들의 여자 친구 사진까지 간직하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아니 그 마음이 사람을 귀히 여기는 아름다움으로 보여서 나도 지녀 볼 욕심으로 가족사진들을 꺼내다 보니 묵은 사진첩까지 들추게 됐다. 그러다가 발견된 사진 속 이 남자.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친구와 둘이서 바닷가에 서서 찍은 사진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우리 어깨너머 저쪽에 바닷물이 모래톱을 쓸고 있는 기슭에 그 젊은 남자는 서 있었다.

우리가 찍은 사진 속에는 때때로 이런 낯선 사람이 엉뚱하게 함께 찍혀 있곤 한다. 원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사진이었다. 친구와 둘이서 바닷가에 온 기념으로 찍은 몇 장의 사진 중에 한 장이었다. 그런데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우연히 옛날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시선은 왜 나와 내 친구의 어깨 너머의 낯선 사람에게 가서 멈춘 것일까. 그 남자의 신분이나 얼굴 생김이 내 마음에 그 무엇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 남자의 모습은 삼십여 년 전 어느 날 바닷가로부터 돌연 나의 내면적 사생활 속으로 들어와 나와 함께 살며 내 시간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끝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변의 이 낯선 남자는 허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날 그 순간, 그 바닷가 카메라 렌즈가 겨냥했던 그 모래톱에 서 있었다. 그 우발성의 자명함에 나는 좀처럼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순간 이후 남자는 결코 한 번도 그 자리, 그 자세, 그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남자를 찾아내어 사진을 보여주고 삼십여 년 전 그날을 상기시킨다고 해도 그는 해변의 그 낯선 남자로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그것이 사진이다. 단 한 순간의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개별성과 일회성,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해 놓은 섬.

세상의 모든 사진은 시간 속의 섬이다. 절대고독을 지닌 저마다의 섬이다. 이 섬은 모든 일반화를 거부한다. 이 남자처럼 오직 한순간, 한 장소, 한 가지 태도에 제한돼 있을 뿐이다. 이 남자처럼 찍히는 순간에 하나의 섬이 되어 자신의 ‘섬’ 속에 갇혀 사는 것이다. 사진 속 시간에 고정돼 있기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섬이다. 이 섬은 단순히 시간 속을 흘러가는 섬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계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간 속에 분리돼 떠 있는 섬도 아니다. 이 섬은 그도 나도 다시는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사진을 갖고 싶어 한다, 한 장으로도 성이 차질 않아서 찍고 또 찍어 간직하려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꽃 아래 서 있는 모습, 언덕에서 바람을 받으며 서 있는 모습……. 네모난 테두리를 방파제 삼아 넘실거리는 삶의 파도를 차단하고 내 시간의 바다에서 영원한 섬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바닷물이 돌연 얼어붙는다 해도 그 부동의 순간들만큼은 내 마음의 바다에 떠다니는 꽃섬으로 가둬버리고 싶어서 일게다.

큰 아이의 사진은 지난 여름 외국 여행지 배 위에서 석양을 비껴 받으며 서 있는 모습을 골랐다. 둘째아이 것은 작년 생일 날 고깔모자를 쓰고 활짝 웃는 모습을 지니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남편의 것은 삽십 대 초반, 친정집 골목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서 있는 사진으로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식물인간처럼 누워 계시는 친정어머니의 열아홉 살 적 사진이 눈에 띈다. 가버린 어머니의 젊음을 다시 붙들어 오듯 얼른 주워든다. 이렇게 사진 몇 장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진 속에 내가 가장 꽃섬으로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고르는 손길이니 적잖은 망설임이 따른다.

골라 놓은 사진들을 한 줄로 늘어놓고 바라본다. 나는 그들의 이 사진 속 순간들을 내 시간에 가두고 싶은 꽃섬으로 명명하지만 그들은 나의 어떤 섬을 자기들이 간직하고픈 꽃섬이라 할까.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 살아온 길목, 아프게 남아 있는 기억 속의 어느 한 순간쯤은 지그시 눈 감고 환하게 웃어넘기는 그런 섬으로 남겨 두고 싶다.


<약력> 1992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 회원, 수필문우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 대한문학 주간, 예술광주편집 위원, 금요에세이 지도강사, 목요에세이 지도강사, 무진주수필문학회 지도강사, 광주예총문화예술대상 수상, 현대그룹문학상 수상, 광주문학상 수상, 대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