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처염상정(處染常淨) 소묘란 수필

2017년 07월 24일(월) 20:05

處染常淨 (처염상정).

지리산 산사에 계시던 스님께서 군에 있던 작은아들에게 적어준 글귀이다.

십 여 년 전 일이다.

“아드님이 조금 다쳤습니다. B 이병 어머니께서 올라오셔야겠습니다.”

아들이 배치돼 있는 부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자대 배치를 받았다고 연락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받은 소식은 날벼락이었다. 어릴 때 몸이 약해 운동을 시킨 것이 특공대로 차출되어간 화근이었나 생각하니 뒤늦은 후회도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대로 먼저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입원해 있는 아들을 먼저 만나 본 후 가겠다고 했다. 후들거리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가니 아들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눈은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두 눈에는 핏줄이 터져 결막하출혈이 생겼으며 갑자기 피를 많이 쏟아 심한 빈혈 증세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입원을 거부해 부러진 갈비뼈가 잘못하면 폐를 찌를 수 있으니 입원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강력하게 권유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전화상으로는 훈련 중 다쳤다 했지만 구타가 아닐까 의심되었다.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 내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아들 손을 가만히 잡고 어쩌다 맞았니? 하고 물었다. 구타를 의심한 물음에 아들이 잠시 놀라는 기색이더니 이내 “어머니 이번 일 조용히 넘기면 안 될까요. 제발.” 하는 게 아닌가. 훈련 중 다친 것인지 아니면 구타였는지 그것만이라도 말해주길 바랐지만 아들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훈련 중 다친 부상이라면 굳이 숨길 필요조차 없을 텐데, 더 물어보았자 말 할 것 같지 않아 할 수없이 등만 토닥여주고 병실을 나왔다.

부대로 향하는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일을 키우지 않으려는 아들의 의지는 알겠으나 그렇다고 구타였다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는 사이 부대에 도착했다.

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서니 부대 책임자가 우리 내외를 맞으며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지금은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지만 구타한 자가 있다면 영창을 보내던지 다른 부대로 옮기든지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들은 구타라고 입 밖에 내지도 않았건만 부대에서는 구타였음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처리하길 바라는지도 물었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마주쳤던 한 대원의 눈빛이 떠올랐다. 경직되고 몹시 불안해 보이지 않던가. 그래. 그들도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지. 어쩌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불행 중 다행이라 했던가. 그나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니 우리 측에서 무마시키지 않으면 또 다른 부모들이 가슴앓이를 해야 할 일이다. 부대원들을 지키기 위해 함구하고 있는 아들의 뜻도 있지 않는가. 마음을 정리했다.

“저희는 가해 대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아들이 완치해서 부대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 시간 이후 또 다른 대원들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해 주시기만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긴장감이 돌았던 면담을 마치고 나오니 몇 명의 대원들이 정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결론이 날지 또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불안에 떨었을 그 아들들 또한 안쓰러웠다. 밖으로 나와 그 대원들에게 떡과 과일을 주문해 부대로 들려 보내고 우리는 광주로 내려왔다.

그렇게 이해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그 일은 그리 쉽게 없던 일처럼 되지는 않았다. 대인배 흉내를 냈지만 마음은 평탄치 않았다. 아들이 폭행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달포가 지나도록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소식은 우리 내외를 다시 괴롭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잡으려 절을 찾아다녔다. 가까운 곳도 또는 먼 곳에도.

그러던 어느 날 지리산 자락에 고즈넉한 절을 찾았을 때였다. 고찰이었다. 법당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스님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아무 말씀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 주셨는데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려니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급기야 늘 마주쳤던 분에게 호소하듯 아들이야기를 쏟아놓았다. 묵묵히 긴 이야기를 들어주시던 스님께서 조용히 일어나시더니 책 한 권을 꺼내.

處染常淨 (처염상정. 진흙에서 꽃을 피우다)이라 쓰시고 그 밑에 아들 이름 석 자를 정성스레 적어주셨다. 군에 있는 아들이 책을 읽기에는 시간도 이해도 어렵겠지만 부적처럼 곁에 두고 한 줄 두 줄 읽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스님의 책은 우리 내외에게 그리고 상처가 컸던 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내 아들이 겪었던 그날의 사건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덮어지고 잊혔지만 아들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흔적으로 남았을 것이고 또 배려와 용서라는 그릇으로 새겨져 있을 것 같다.

녹음이 날로 짙어지고 있다. 조만간 연꽃도 피겠지. 마음의 고통 때문에 길 떠났던 지리산 자락에서 스님이 써 주셨던 그 글귀는 오늘도 여전히 생생히 피어 있다.

지금은 소백산 줄기 어디엔가 계신다는 스님 큰 스님을 뵈러 떠나야겠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 그 고운 꽃빛으로 살기를 염원하면서.


<약력> 1991년 ‘시와 의식’ 등단. 저서 ‘지금도 그곳에는’, 광산문학상·대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