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 손수레 할머니를 기다리며 박용수 |
| 2017년 08월 07일(월) 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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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층 아파트 사이로 손수레가 폐지와 폐품을 가득 싣고서 버겁게 언덕을 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가린 수건 틈새로 할머니의 희끗한 머리카락이 땀방울에 젖어있다. 더 높이 치솟고 있는 아파트, 그리고 더욱 납작하게 엎드린 할머니. 어색한 풍경을 벗어나려는 찰나, 무엇인가 내 앞을 획 지나친다. 유기견이다.
내친 김에 유기견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공사 현장을 바라본다. 바위를 뚫는 굴착기, 땅을 고르는 포클레인, 건물을 올리는 타워크레인 등등 기계들이 첫눈에 띈다. 사람들의 일터가 아닌 로봇들의 일터 같다. 자동차가 출입하는 지하차도, 폭포수가 자리한 대리석 정원, 깊은 산속에서 옮겨온 것 같은 잘 자란 나무들, 그리고 당장 뛰어들고 싶은 동심을 자극하는 놀이터가 보인다. 신축 아파트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동화처럼 멋지다.
이런 아파트에 살고 싶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활기찬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지하차도를 통해 기분 좋게 출근을 하고 싶다. 퇴근해서는 대리석 정원에서 커피를 한잔 하고, 멋진 소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는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잠시 놀다가 아파트 1층에 마련된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발자국 걷는데, 무언가가 발목에 걸려 엉거주춤 물러섰다. 붉게 변한 구부러진 철근 도막이 무릎에 걸려있다. 입구 바닥, 땅에 파묻히지 않은 폐 철근이 표면에 돌출된 것을 몰랐던 것이다. 철근은 내가 싫다고 몸부림치는데도 내 바지를 단단히 붙들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 있다. 거대한 거머리처럼.
철근을 빼내려고 무릎을 굽히다가 이내 시선에 들어오는 땅바닥, 아! 유리조각 쇳조각 깡통조각 벽돌조각, 스티로폼 각종 공사용품들이 별자리처럼 땅에 박혀있다. 밤하늘에 별처럼 땅에 붙어 있는 버려진 조각들. 유심히 바라보니 유리조각은 반짝반짝 1등성처럼 밝고, 깡통조각과 쇳조각은 3등성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나마 벽돌이나 스티로폼 조각은 희미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파란 하늘을 오염시키는 저 파편들이 유기 견처럼 땅을 떠돌고 있다. 새로 짓는 아파트는 이렇게 흙의 희생 위에, 이 땅을 만신창이로 만든 그 위에 만들어지는구나. 우린 웅장한 아파트만 바라보았지 그 아파트를 떠받치고 있는 아파트의 신발을 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아! 지금껏 내가 이토록 오래도록 이토록 집중하고 땅바닥을 흙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흙은 흙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흙이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질병을 앓고 있다. 아! 순결함이 망가진 …….
순간,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발을 내밀었던 기억이 본능처럼 떠오른다. 밀크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흙, 생명을 키우는 흙이 날카로운 유리파편을 세우고, 깡통의 예리한 부분이 송곳처럼 솟아나서 내 발바닥을 향해 뚫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땅에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내 발바닥을 뚫고 올라온다면, 쇳조각이나 깡통조각들이 내 혈액을 파고들어 심장을 향해 온다면 어느 누가 바지를 걷고 못줄 앞에 서겠는가.
최근 국제연합 식량 농업 기구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세계 토양의 25%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 8%는 훼손 상태가 우려되는 정도, 그리고 36%는 약간 훼손된 상태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땅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햇빛, 공기, 산소, 물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의 식량을 생산하고 발을 디디게 해주는 존재의 기반이다. 그런 토양은 농작물을 기르는 생산기능, 양분, 수분, 탄소 등의 저장 기능, 모든 생물을 배양하는 동시에 분해 정화하는 기능, 각종 산업 원료를 공급하고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는 등의 중요하고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최근 인구 증가, 지구 온난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지속 불가능한 집약적 농법, 부분별한 산림개발 등으로 인해 토양이 침식, 유기물 감소, 사막화되는 등 오염 및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논에 들어가 모를 심어본 사람들은 안다. 이른 아침 논에 발을 담그는 서늘함,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돋았다. 게다가 다리에 빨판을 대고 죽기 살기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보면 호들갑을 떨며 논 밖으로 나오곤 했다. 거머리가 무서웠겠는가. 노동의 피로를 덜기위한 일꾼들의 재치고 재미였으리라.
하지만 머지않아 진짜 거머리가 나타날 것 같다. 이젠 논밭에 들어가서 맨발 맨손으로 작업을 할 수 없을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영화의 평화로운 장면으로 자주 등장하는 푸른 언덕에 팔베개를 하고 누울 수도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함부로 쓰고 버린 날카로운 폐기물들, 병조각 유리조각 플라스틱 조각들이 땅을 뚫고 공기를 뚫고 벽을 뚫고 나타나 우리들의 등을 향해, 심장을 향해 파고들 것만 같다. 그것들이 우리 몸에 우리 심장에 빨대를 대고 피를 쭉쭉 빨아댈 날도 머지않을 것 같다. 도시의 이곳저곳에 버려진 거머리들이 우리 발에 딱 달라붙어 온몸을 칭칭 감고서 우리들의 피를 빨아댈지 모른다.
순간, 고개를 들어 할머니가 사라진 아파트 사이를 바라본다. 갖은 폐물을 싣고 힘겹게 손수레를 끌고 가던 그 할머니, 모를 심다가 내 종아리에 커다란 거머리가 붙어있음을 보고 기겁을 하며 달려갔던 어머니, 어머니처럼 보인다.
<약력> 전남일보 2004년 신춘문예 ‘아버지의 배코’ 등단,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현 동신고 교사, 수필집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