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문예르네상스를 꿈꾸다] (3) 운림산방 남종화 산실 운림산방엔 ‘구름 농사꾼’이 산다

2017년 08월 30일(수) 18:56

한 채의 집이지만 이 운림산방에서 소치 허련, 미산 허형, 임인 허림, 남농 허건, 임전 허문, 의재 허백련의 대가들이 배출됐다.

이 글은 (재)전남문화관광재단 남도문예르네상스 콘텐츠관광자원화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운림산방에 네 번을 갔다. 새벽에도 가보았고, 해질녘에도 가보았고, 섭씨 삼십오 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도 가보았다. 그 중 하루를 빼고는 일기가 어두웠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연못 가운데 배롱나무는 쉬이 꽃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흘 뒤면 필 것 같은 꽃이 열흘 뒤 가 보아도 별 소식이 없었다. 다시 또 일주일 뒤에 가보아도 배롱나무는 몸 속에 감춘 꽃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옷고름을 단단히 여미는 여인 같았다. 하지만 그런 비유는 관념 속의 것이다.

이대흠 시인·소설가

운림산방에는 구름이 많다. 백로지 같은 흰 구름이 촘촘히 하늘 바닥에 놓여 있다. 하얀 바탕에는 이따금 갈필(마른 붓끝에 먹을 살짝 묻혀 거칠게 그리는 화법의 하나)로 휘저은 듯이 거친 검은색이 스쳤다. 먹선 안에도 흰 색이 엿보인다. 칡뿌리 붓으로 빠르게 스친 선 같다. 하지만 농묵(濃墨)으로 진하게 그은 선보다 더 힘차 보인다. 갈필법으로 그린 선은 먹이 부족해서 덜 그린 것이 아니라, 버릴 것 다 버리고 난 뒤의 고갱이만 남긴 것이기 때문이리라. 봄 나무의 잎 같은 게 녹묵이라면, 가을 나무의 잎 같은 게 갈필이다.

운림산방의 주인이었던 소치 허유가 빼어난 예술적 성취했다고 평가받는 작품 중 상당수는 갈필법으로 그린 수묵화다. 일찍이 허유는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배웠다. 하지만 동네화가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후 대흥사의 초의를 찾아가 3년 동안 그림을 배운다. 진도에서 험한 뱃길을 건너 해남 대흥사 일지암으로 유학을 간 것이다. 거기서 3년 동안 초의로부터 그림을 배운 소치 허유. 어디 그림만 배웠겠는가? 다선이라 불리는 초의였으니, 차와 선이 바탕이 됐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시쓰기에 능한 초의와 함께 보내며, 시심 또한 자라지 않았겠는가.

소치가 초의에게 그림을 배우러 갔을 때는 1836년으로 소치가 28세가 됐던 해이다. 요즘의 나이로도 대학원을 마칠 나이이니, 당시의 나이로는 적지 않는 나이였다. 조로했고, 단명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는 서른쯤의 나이가 되면 인생을 갈무리 하는데 애썼다. 하지만 소치는 그 나이에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백련이 피어있는 운림산방 연못.

소치와 3년을 보낸 초의는 소치의 재능을 알아보고 추사에게 소개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세기 문인화단의 두 천재가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리고 추사와의 만남은 소치에게는 인생전환점이 됐다. 1839년의 일이다. 추사가 살던 장동의 월성위궁에서 추사를 만난 소치는 초의가 준 편지를 내밀었다. 추사는 반갑게 맞아 줬다. 소치는 거기에 머무르며 추사의 가르침을 받는다. 어느 날 추사가 소치에게 묻는다. “화도(畵道)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네. 자네는 이미 화격(畵格)을 터득했다고 생각하는가?” 대답을 못하는 소치에게 추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는 화가의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는 천리길에 겨우 세 걸음 옮겨놓은 것과 같네.” (‘소치실록’에서)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려온 것이 불과 서너 걸음에 불과한 것이었다니! 보통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치는 쉬지 않고 남은 천리를 걷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보낸 몇 년 동안에, 그림에 미쳐서 28세에 그 길을 자신의 인생길로 선택했던 시골뜨기 화가 소치가 마침내 장안에 알려지게 된다.

사람들은 소치의 그림을 다투어 찾았고, 칭찬에 인색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추사는 소치에 대해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한다. “시, 서, 화에 있어서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던 추사의 말은 제자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소치’라는 호는 이 무렵 생긴 것이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인정해, 중국 원나라 4대 화가 중 하나인 황공망의 ‘대치(大痴)’에 견줘 ‘소치(小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홍예다리 아래로 본 연못과 운림산방. 항상 뜬 눈의 눈동자 같다.

하지만 2년여가 지났을 때, 추사는 정쟁에 휩싸여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소치 또한 스승의 유배지로 따라 나선다. 그리고 유배지에 안치된 스승에게서 그림 공부를 더한 것이다. 그렇게 탱자울타리에 갇힌 스승과 함께 자신을 그림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 후 4개월쯤이 지났을 때, 소치는 작은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진도로 돌아온다.

제주와 진도 사이의 거리가 지금은 멀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 당시에 제주로 건너가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오죽했으면 제주에 닿기 전에 보이는 섬의 이름을 관탈섬이라 했을까. 제주로 가는 이들은 관탈섬이 보일 때에야 비로소 관을 벗고, ‘아. 이제는 살았구나.’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만큼 제주는 멀고도 험한 길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섬이었다. 소치가 추사를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이지만, 곁에 없다고 해서 스승을 스승으로 받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치는 평생 스승의 글씨인 추사체를 본떠 썼으며, 스승의 그림을 대놓고 베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제주와의 인연 때문인지, 운림산방의 여기저기에는 제주산으로 보이는 괴석들이 놓여 있다. 소치가 직접 심었다는 주변의 나무들은 우거져 있고, 그늘진 곳에 소치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운림산방 마루에 앉아 본다. 꽃 필 때를 그토록 기다렸던 배롱나무에 겨우 몇 점 꽃이 맺혀 있다. 맺고 피고 이운다. 그것이 이치다.

차를 우리면 찻물이 되고, 먹을 갈면 먹물이 되었을 소치 생가 앞 새암.

스승 추사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던 소치였지만, 1856년에 추사가 타계하자, 소치는 고향인 진도로 와서 운림산방을 세우고, 8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상상해본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구름을 키우고 구름 바탕에 먹을 치는 일과 같았을 것이다. 마루는 각이 져 있고, 연못 속 배롱나무 섬은 둥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거리가 속계와 선계의 거리이다. 문틀을 액자로 한 그림 속에 구름이 가득하다.

구름 가득한 하늘 저편에서 누군가가 아직도 구름 농사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 소치 이후, 운림산방은 하나의 화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곳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대에 걸쳐 소치를 포함한 5명의 화가를 배출한 산실이 됐다. 1대인 소치 허련, 2대 미산 허형, 3대 임인 허림과 남농 허건, 4대인 임전 허문이 있다. 거기에다가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 이곳이니, 운림산방은 남종화의 산실이요. 남종화의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진다. 후끈 달아오른 대지가 거친 숨을 토한다. 비가 내리는 순간에 하늘과 땅은 이어진다. 바라본다. 빗방울 떨어질 때마다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시간의 개입으로 공간은 고정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시공의 넘나듦이 없었다면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죽음과 삶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그림 밖에서 그림을 보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구름이 자라는 숲, 운림(雲林)이다. 아니 구름 농사꾼이 그림의 씨앗을 심고 있는 곳이다. 구름이 자란다. 청묵(淸墨)같은 하늘 밭이 백로지처럼 깔렸다. 먹물 같은 빗물이 돋을 때마다 새로운 그림이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것 같다.


※ 함께하는 코스

진도의 운림산방을 볼 때는, 광주의 의재 미술관과 목포의 남농미술관을 함께 들러보는 것이 좋다. 소치에 이어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이 이름을 떨쳐 비로소 운림산방이 남종화의 산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의재미술관(광주 증심사 근처) →남농미술관(목포문화예술회관 근처)→운림산방

※ 맛집

남도의 여름철 별미로 민어회가 있다. 목포에서 1박을 하며 민어회를 맛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목포 민어의 거리에 있는 ‘영란횟집’은 손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가도 실망하는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