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통치술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사장 ssnam48@kjdaily.com

2017년 09월 20일(수) 19:50

2017년 대한민국을 역사에 기록한다면 ‘블랙리스트’란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할 것 같다. 올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들었던 소위 박근혜정권의 블랙리스트는 대통령을 파면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라는 말은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 흔히 수사기관 따위에서 위험인물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마련한다. ‘감시 대상 명단’, ‘요주의자 명단’ 혹은 ‘살생부’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야당후보인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한 예술인과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를 하거나 시국선언을 한 문제단체 100여곳 1만여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으로 정부 지원을 끊거나 검열 및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비밀리에 작성되었다. 특검은 블랙리스트 존재를 확인하고 조사해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을 구속기소하였다.

그런데,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블랙리스트가 키워드다. 하반기엔 이명박정부의 블랙리스트가 터졌다. 최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실명이 적혀 있는 문건이 발견되면서 문화예술계가 들썩거리고 있다. 방송인 김미화를 비롯해 문성근 이외수 김여진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제동 등 총 82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 문성근 김미화씨 등은 집단소송을 준비하며 불의한 역사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19일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와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국정원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고발한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안’과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 등 소위 ‘박원순 제압문건’을 국정원이 작성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시민의 양심자유, 언론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침해하고 법률을 위반했기 때문에 법규에 근거한 정책규제가 아닌 위법행위다. 그러나 불법을 저지르고도 블랙리스트를 만든 이들은 사회혼란 수습, 좌파종북 척결, 국가안보 등을 내세워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력은 속성상 공정하고 정의로운 배분보다는 반대파를 통제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지배관료의식이 강할수록 정치·경제·사회·문화계에서 현 정권에 반대의견을 낸 리더에게 불이익을 주어 길들이기 하고 싶어한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2017년을 강타한 박근혜·이명박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보면서 필자가 우려하는 바는, 이게 단순히 불이익을 주기 위한 통제가 아니라 일종의 ‘통치술’이었다는 점이다. 몇몇 관료의 취향이나 기호, 성향이나 선호를 반영한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활동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국가예산으로 통제하려는 국가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무섭기까지 하다.

현재 검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하는데 청와대 뿐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환경부, 식약처, 산림청까지 거의 모든 정부부처가 움직였다는 정황이 나왔다. 정치권력은 거대한 국가망을 통해 작성된 블랙리스트를 통해 예산, 정부지원금, 직간접 보조금을 통제하고 금융지원이나 대출, 방송출연, 공연, 전시까지 보이지 않는 불익을 주었다. 심지어 개인사생활을 의도적으로 터트려 명예를 손상시켜 다시는 활동을 못하게 하는가 하면, 불륜을 조작하기도 했다.

이런 거대한 조직적 블랙리스트 통치는 블랙리스트 밖에 있는 문화예술인까지 표현을 위축시키고 미리 조심하게 하는 통치효과를 내는게 사실이다. 얼마전 박영수특검은 박근혜정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설명하며 ‘시장 원리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문화·예술의 다양성 구현을 위한 핵심 정책수단으로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는 연간 약 2,000억원 규모의 문예기금 등 국가 문화 보조금을 정파적 지지자에게만 공급하고,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을 배제하여 예술의 본질적 영역인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한편, 문화적 다양성을 잃게 함으로써 문화예술인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소비자인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안이다’고 규정했다. 또한 “결국 정부, 청와대의 입장에 이견을 표명하는 세력은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정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려는 행위로 바라보는 시각에 기인한 것으로서 헌법의 본질적 가치에 위배되는 중대 범죄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 통치’는 포용과 통합이 아니라 이런 배제와 박탈의 정치를 하려는 수작으로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고 도태시키면, 입맛에 맞는 문화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을 확고하게 굳히고 나서 다른 의견을 몰아내려는 배제의 인간학은 늘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민주주의도 30여년의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민주주의가 침해받고 불법을 통해 통치수단이 되는 이유는 뭔가. 통치자가 문화와 대중 심리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수단, 혹은 정권의 나팔수, 정위부대 수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파를 제압하고 배제하는 이념전쟁 도구로 악용했을 터다.

만약 지금도, 정부방침과 다른 주장을 하면 혹시 찍히지 않을까? 보조금이 끊기거나 불이익당하지 않을까?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심하고 자기검열을 한 국민이 있다면 블랙리스트 망령은 계속 살아있는 셈이다.

어떤 통치자도 ‘블랙리스트 통치’를 꿈꾸지 못하도록 이번에 제대로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다.

/ssnam48@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