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원형의 보고 '광주사직동'](17) 사직동의 시비석 [義鄕·藝鄕 향기 품은 남도 詩文學 산실

2017년 10월 18일(수) 18:42

광주공원에 자리 한 강진 출신 영랑과 송정 출신 용아의 시혼(詩魂)과 우정을 기린 아름다운 쌍둥이 시비. /김애리 기자 kki@kjdaily.com

언제부터인지 사직공원에 시비가 세워진다. 그러더니 지금 10개가 넘는 시비는 어느덧 사직공원의 명물이 됐다. 이젠 사직공원은 사직단 때문이 아닌 시인들의 시비공원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광주를 포함한 남도는 예향으로 불린다. 판소리 등 민속예술이나 회화, 도자기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가 문학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특히 식영정·소쇄원·환벽당을 품고 있는 무등산은 가사문학의 발상지다. 그 가사문학의 전통은 근·현대시로 계승됐고,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배출한다.

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역사)

사직공원 시비 중 낯익은 시가 백호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임제의 시비에 새겨진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시는 백호 임제가 개성의 황진이 묘를 찾아가 읊은 것이다. 그 때 임제는 35세,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개성을 들러 가는 길에 평소 만나보고 싶던 풍류 여걸 황진이가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이 사건은 이후 임제가 중앙 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사대부의 체면을 구겼다는 당시 지배층의 괘씸죄 때문이었다.

호남 유림의 좌장이자 면앙정시단의 대부로 추앙된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의 시비에는 ‘자상특사황국옥당가’가 새겨져 있다.

사직공원 박상 시비.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운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자신을 경박한 복숭아와 오얏꽃으로, 임금을 황국화로 묘사하고 있다.

오늘 남도는 굵직한 수많은 현대 시인을 배출한다. 그 중 휴전선 시인으로 불린 박봉우(朴鳳宇·1934-1990)의 ‘조선의 창호지’는 필자의 발을 붙잡는다.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하늘만큼 한 사연을…/ 눈물을 흘리지 말고/ 웃으며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하늘만큼한 밤을…/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이수복(李壽福·1924-1986)의 ‘봄비’는 1984년까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암송되던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다.

교과서에 서 본 그 시를 시비에서 다시 보는 감회가 필자에게도 새롭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사직공원 김덕령 시비.

광주 서창 출신 박상(朴祥·1474년-1530)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였다.

연산군 11년(1505), 전라도 도사로 근무할 때 나주에 연산군의 애첩(숙용 우씨)인 딸의 권세를 믿고 남의 전답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한 우부리를 나주 금성관에 잡아 매질해 죽인다. 그리고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후일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죽자 ‘신비복위소’를 올려 폐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줌과 동시에 복위시키고, 신씨의 폐위를 주장한 반정공신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죄 주라는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린다.

그 박상의 시비에는 “길은 산에 묻혀 이름 없이 산다한 들/ 천기 변할 때는 가슴이 조일레라/ 밤 사이 비바람이 얼마나 휘몰아쳤는지/ 낙화는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라는 시가 새겨져 그의 올곧은 성품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광주를 상징하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최고 번화가인 충장로의 주인공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 의병 총사령관이 된 그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29세 젊은 나이에 여섯 번의 혹독한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65년이 지난 후에야 신원이 회복되지만, 김덕령은 여전히 억울함의 상징 인물이다. 그의 억울한 심정이 진하게 묻은 시도 시비에 새겨져 세워져 있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핀 꽃 다 붙는다/ 저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연기없는 불이 나니 끌물 없어 하노라.”

사직공원 윤선도 ‘오우가’ 시비.

광주 금남로는 한국 민주화의 성지다.

그 금남로의 주인공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이괄의 난을 진압해 인조의 은인이 된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이다. 그래서 받은 군호가 ‘금남’이고, 그 군호를 따 그를 기리는 금남로의 이름을 삼는다. 그의 시비에 새겨진 시에도 우국충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우는 저 두견아/ 촉국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히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고, 정유재란 당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민족의 영웅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시비도 전망 타워 바로 아래 서 있다.

충청도 아산 출신이지만, 남도 땅에서 활동했던 그의 업적을 고려한다면 시비의 건립은 뜬금없는 일은 아니다. 그의 시비에는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위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잠길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나라 위한 우국시가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사직공원에는 많은 시비가 서 있다.

장성 필암서원의 주인 하서 김인후(金鱗厚·1510-1560)의 시비도, 한국 국문학의 대표 시조 시인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오우가를 새긴 시비도, 현대 시인 이동주(李東柱·1920-1979)의 대표작 강강술래를 새긴 시비도 서 있다.

양림산 자락 호남 신학대학교 교정에는 ‘가을의 기도’가 새겨진 양림동 시인 김현승(金顯承, 1913-1975)의 시비도 만날 수 있다. 광주공원에는 강진 출신 영랑과 송정 출신 용아의 시혼(詩魂)과 우정을 기린 아름다운 쌍둥이 시비도 있다.

오늘 사직공원은 면앙정 송순에서부터 이수복·이동주·박봉우 등 근·현대 시인에 이르기까지 10여기가 넘는 시비가 서 있다.

이 시비들은 팔각정 대신 들어선 전망 타워와 함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가는 명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모습도 눈에 띈다.

일부 시비는 마모돼 시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여기 저기 흩어진 시비를 일일이 찾아내어 읽는 재미도 솔솔하지만, 다 찾아내어 읽기는 결코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