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희정의 책 읽기 삶 읽기]미남과 부조리 |
| 2017년 10월 18일(수)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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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으로, 매일같이 세상 근심에 파묻혀 사는 나로서는 그녀의 착각이 신선했다. 이차적으로 ‘그러니까 잘생긴 남자’를 들이미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잘생긴 남자말고 정신소통이 되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쏘아붙이고 서둘러 빠져 나왔다. 신문과 순수함의 짝으로 미남을 꼽은 그녀의 사고방식이 놀랍고, 이해할 수 없다. 정작 그녀는 무던히 내뱉은 호의에 대한 내 냉랭한 반응에 언짢음을 감추지 못한다. 팬이 안티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보이는 몇 개를 가지고 대상을 전부 파악한 듯 구는 것처럼 저급한 이해는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사유한다는 것은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위한 몸부림 자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수고로움을 싫어한다. 자기 위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하다. 사랑은 이동이고, 이것이 조리다. 사랑은 수고로움에서 시작하며 불편함은 사랑의 성격이다. 부동의 게으름은 세계악과 부조리의 주범이다.
누적된 주체들의 부조리가 구조적 모순을 낳는다. 모순은 견고해지고, 세월과 더불어 인습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일상에서 크고 작은 부조리에 맞닥뜨릴 때마다 이청준의 ‘살아있는 늪’을 떠올린다. 부조리를 평범하고 따스하게 담은 길지 않은 중편이다. 가난한 고향집을 방문하고 상경하는 대학생 지식인이, 승차한 버스가 고장 나 길바닥에 멈추자 승객들과 운전수로부터 겪게 되는 부조리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념적이고도 이지적으로 서술한다. 대학생은 이청준 작가의 분신일터.
이 땅의 지성의 상징인 이청준에게 일찍이 매료돼, 나는 어느 해 뜨거운 여름을 몽땅 그의 작품들에 바쳤다. 이청준은 많은 소설에서 사회와 인간의 부조리를 다룬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살아있는 늪’은 특히, 부조리한 상황 앞에 무력한 개인을 잘 묘사한다. 타개가능성이 봉쇄된 부조리한 세계. 달리 어찌할 바 없는 주체들의 막막함. 작가는 이러한 상황이 원천적으로는, 부조리를 받아들여온 주체들의 습성에서 비롯됐음을 암시한다. 주인공 지식인은 끝내, 부조리 앞에 관성적으로 체념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사람값의 시늉이라도 하라”며 절규한다. 으레, 승객들은 도리어 그에게 혼자 잘난척한다며 호응은커녕 비난하고 빈정거린다.
여기까지는 퍽 익숙한 정경이다. 작품의 매력은 그 이후 펼쳐진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실망한 그에게 탑승객중 엿을 파는 아낙이 엿덩이 한가닥을 권한다. “세상일에 어떻게 다 아는 척을 하고 살겄소. 엿덩이를 빨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오.” 몰지성적으로 느껴지는 시골 여자의 위로는 놀랍게도 지식인 청년이 삶이라는 늪의 밑바닥을 이루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질곡의 삶임을 일순간 깨닫토록 한다.
생 자체가 이미 거대한 부조리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이 생래적이고 본질적인 부조리를 살아내는 것이 생명력이고, 청년은 그 생명력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숨결을 자각한다. 거대한 부조리에 체념하건 항거하건 우린 각자의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눈치챘듯 순응과 체념마저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인식은 어쨌거나 변화 가능성의 씨앗이다. 인식은 새로운 앎이므로, 내 습성과 처지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인식은 그러므로 사랑의 몸짓이다. 연애시절, 우리는 그(녀)를 인식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다만, 우리가 철저히 배격해야할 것은 인식 없음, 즉 사고의 정지 상태다. 사실, 부조리는 여기서 새롭게 증식한다. 사고 중지야말로 완벽한 봉쇄를 자초하는, 그리하여 주체의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마는 진짜 위험한 부조리다.
중년 여성의 인식 없는 호의는 내게 불쾌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그녀는 되려 앞으로 ‘여간내기 아닌’ 나를 보면 몸을 사릴 것이다. 제자리에 맴도는 사고의 씁쓸한 결말이여! 부조리는 이처럼 스스로 구제되지 못하고 새로운 층위의 부조리를 생성한다. 무력한 것은 부조리 앞의 주체가 아니다. 주체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부조리가 무력하다. 아낙의 엿덩이보다 강력한 위로가 나한테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