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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 라온 사랑 이정선 수필

2017년 12월 18일(월) 18:56

연휴 사흘 꼼짝 않고 집에서 뒹굴었더니 허리가 무질근하다. 요가 선생님 역시 쉬는 동안 허리통증이 왔다고 한다. 디스크에는 혈관이 없어서 가만히 있으면 산소 공급이 안 되어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허리를 움직여서 디스크 주위의 근육을 늘리면 산소가 그 틈바구니를 뚫고 추간(椎間) 연골 속으로 공급되어 혈액순환 효과가 나타나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손쉬운 치유법이란다. 한 시간 동안 근육을 늘리며 쥐어짜듯 몸을 움직였더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없어졌다.

사랑에도 디스크처럼 혈관이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랑 혼자선 할 수 없네.’ 라는 노래가사처럼 짝사랑은 속이 타들어가고 마음이 멍든 채 사모하는 사람의 눈길 밖에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는 결국 병든 사회에 한 몫 끼어들지 않던가.

그렇다면 노인들은 사랑하고는 상관없는 존재일까? 아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타인의 온기를 갈망하는 존재라고 한다. 몸과 마음에 정(情)이란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디스크에 걸려 치매라는 불청객이 쳐들어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나날이 목숨을 조여 오는 그분들의 일상에 사랑 갈구라는 디스크 치유책이 반드시 필요할 터.

애초에 인간의 뇌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공부하라고 생긴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서로를 그리워하라고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만 살수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랑으로 인해 더욱 살기 좋게 될 수 있을 텐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 먹먹해지며 말문까지 막히는 사진 한 장을 본다. 어느 화가가 그린 인물화인들 이보다 훌륭할까? 그 어떤 풍경화가 이다지도 아름다울까? 문우의 97세 어머니와 두 살 연하의 복지관 할아버지가 벤치에 앉아 다정히 손을 잡고 비스듬히 서로의 머리를 맞댄 채 세상 시름 다 잊고 포근히 잠든 모습이라니!! 노년의 불청객 치매라는 병도 세상의 굴레인 염치나 체면, 죄의식이 끼어들 틈도 선이나 악의 경계마저도 허문 신선 계에 드신 양 평화로운 두 분이다. 보는 내 마음까지 이리 흐뭇하니 두 분만이 아시는 영혼의 즐거움을 가슴가득 채우고 더 없는 행복을 꿈꾸고 계시는 듯 여겨진다.

이분들은 부부가 아니요, 더구나 죽고 못 사는 연인 사이도 아니다. 복지관 식구들이 억지로 손 붙들어 잡아 앉힌 연출 사진은 더 더욱 아니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력에 끌린 양 자연 발생적 모습이라니. 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감히 어느 누가 입방아 찧겠는가. 마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한 어린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 포근하면서 맑고 밝은 생명력을 무한히 안겨주는 느낌에 휩싸였다. 아마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졌으리라. 곱고 넓고 깊으면서도 따스한 그 경지가 이 세상에 난무하는 세속적인 사랑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옛 사람들은 온 누리가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지극한 경지의 사랑을 ‘라온 사랑’이라 했다던가. 사람들이 즐거울 때 저절로 나오는 가락, 라라랄 라 ‘라’와 온 누리, 온 마음 ‘온’ 의 합성어로 ‘모든 즐거움이 포함된 사랑’이라는 뜻의 옛말이다.

“아들 며느리가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얼른 사진을 치우는 문우의 언짢은 표정을 읽었다. 노모를 지금도 ‘엄니’라고 부르며 모자간에 허물없이 지낸다는 문우의 효성은 작품 세계에서 엿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했던 대로 까꿍 놀이를 하며 노모에게 환한 웃음을 되찾아주기도 하고,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살펴가며 맛있는 반찬을 숟가락에 올려드리는 등 지극정성이다. 그 분의 부인 역시 50년 가까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요즈음 구경할 수도 없는 효부다. 동남아, 중국, 미국 등 해외 나들이 때도 가끔 엄니와 동행하고, 주말이면 종종 노모위주로 외식을 한다고 한다. 객관적인 판단으로도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진 않은 것 같았다.

자식의 극진한 효심도 미처 채워주지 못한 한 줄기 산소, 그 사랑 부족의 디스크였을까? 유달리 복지관 가는 것을 즐거워 하셨다는 노모에겐 바로 그 곳이 메말라가는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오아시스가 아니었는지.

파자(破字)로 본 사랑 애(愛)자는, 누군가를 손으로 덮어 감싸면 마음(心)속에서 서서히 편안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라고 한다. 두 손, 두 마음 포개 기대신 사진의 주인공 어르신들에게 나는 감히 축복의 기원을 보낸다. 머지않아 당신들에게 죽음이라는 마지막 방문객이 문 앞을 노크할 때까지 두 분 모두 상대에게 라온 사랑으로 존재해주기를.

<약력> 전남대 교육대학원 수료(가정교육학 석사), 1992 한맥문학으로 등단, (사)영호남수필문학협회 상임이사, 광주문인협회 이사, 광주수필문학회원, 영호남수필문학협회 광주회장과 광주여류수필회장 역임.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광주문학상, 허균문학상 본상, 국제PEN광주문학상 수상, 수필집 ‘부딪치며 사랑하며’ ‘걸림돌을 디딤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