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리 자전거의 기억 윤태석 한국박물관협회 기획연구실장·문화학 박사

2018년 02월 11일(일) 18:26

필자는 중학교 2학년 후반에 양림동을 떠나 학교가 있던 계림동으로 이사했다. 새로 터를 잡은 자취방은 너른 마당이 있어 좋았지만 늘 단정한 교복에 하얀 피부의 주인집 딸은 사춘기에 접어든 필자의 맘을 설레게 했던 기억이 새롭다.

두 달 전, 출장차 계림동의 한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이곳을 떠난 지 37년 만의 일이다. 자취방을 옮길 무렵 지어진 호텔은 고색의 분위기만을 무덤처럼 간직한 채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시간이 남아 기억 속을 더듬어볼 요량으로 자취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옛 기억을 소급해도 옛스런 골목과 건물은 사라지고 다세대주택들만이 멋대가리 없는 생경함으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호텔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허름한 추어탕집 전봇대에 집나갔다 붙들려온 똥개 마냥 묶여있는 자전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추어탕 집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오래된 화물용 자전거였다. 터진 풍선처럼 주저앉은 앞바퀴, 벗겨진 페인트로 찌그러진 곳이 되레 더 또렷한 차양, 그 위에 붙은 3000리호 마크만이 고달팠던 세월을 읽어내게 했다. 어느 젊은 가장은 짐바리라고 불리던 이 자전거에 어린자식들의 꿈까지 가득 싣고 희망을 페달삼아 쉼 없이 골목을 누볐을 것이다.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뭘 찍소?”, “뭣 허는 사람인디 찍었쌌소?” 언제 나오셨는지 식당 할아버지의 퉁명스런 말이 아침 공기를 갈랐다. 자전거를 훔치다 들키기라도 한 듯 움찔했지만 거침없는 전라도 사투리가 칼칼한 추어탕 국물 같았다.

“다리도 성치 않은 양반이 뭣허요?” 어느새 따라 나온 할머니의 눈빛도 이내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대화는 이어졌다. 두 분은 계림동에서만 40여년을 사셨고, 같은 골목에서 30년 넘게 구멍가게를 하다가 대형 편의점에 밀려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와 식당을 차렸다고 하셨다. “가게 할 때 이 짐바리로 쌀이며 소금, 채소 등을 참 많이도 실어 날리며, 집도 사고 자식도 키웠는디 인자 몸도 아프고 식당함서는 필요도 없게 됐제! 그래도 어찌 팔수가 있것는가?”

아! 그 순간, 그 평온한 순간! 고압전선이라도 닿은 듯 움찔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 가게가 어디였는데요?”, “쩌기 웃 고샅이었는디, 진작 헐려 부렀제.”

3학년 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체육시간에다 종례를 앞두고 대청소까지 해서 그랬던 것 같다. 돈은 없었지만 자취방 골목 초입 가게에 무작정 들어갔다. 가게 안을 살피다 그만 먹고 싶은 과자 몇 개를 훔치고 말았다. 주섬주섬 정신없이 집어넣고 살금살금 나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주인아저씨가 떡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현장 절도범으로 딱 걸리고 만 것이다. “너 이놈! 이루와 커서 뭐가될라고 도둑질이여?”,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호되게 혼이 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싹싹 빈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바빠서 봐주는 디 담에는 진짜 혼날 줄 알어?” 아저씨는 구원 같은 말을 내뱉고는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짐바리자전거에 뭔가를 싣더니 휑하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때 짐바리가 내 낯부끄러운 장면을 싣고 골목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아! 그 아저씨! 그리고 날 지켜봤던 그 짐바리… “할아버지 저 짐바리 제게 파실 생각 없으세요. 네?”, “달라는 이들이 많긴 했는디.” 말끝을 흐리시는 할아버지께 고해 후 사함을 기다리는 속인처럼 간절히 매달렸다. “할아버지 제발 제게 주세요. 제가 잘 보존할게요.”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物各有主)고 했던가. 승낙이 떨어지자 나는 재빨리 식당바닥에 돈을 놓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50대 중년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계림동과 철부지 유년의 필자를 기억하고 있는 짐바리와의 만남은 부끄러움보다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얇은 미소를 머물게 한다. 짐바리는 이렇게 잔잔한 기억과 함께 내 곁으로 소환되었다.

근현대의 힘겹던 비포장 길을 쉼 없이 달려 대한민국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짐바리는 근대화의 상징체로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 상주자전거박물관은 물론 국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을 비롯한 적잖은 박물관에 당당히 소장되어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림동에서 조우한 내 기억 속의 짐바리. 이제는 낡고 헐거워져 당시를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짐바리는 그 어떤 박물관의 유물보다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내 마음 속 진열장 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짐바리의 기억, 비단 그것이 부끄러움의 편린일지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빛나는 보물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