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말 주홍 |
| 2018년 04월 05일(목) 1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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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육남매를 낳았다. 어려운 집안에 시집와서 정치하신다고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동시에 육남매를 키우는 고된 삶을 살아오셨다. 시집와서 몇 년 만에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누워 그 병간호를 하시느라 겨울에도 할아버지의 빨래를 들고 광주천에 나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셨다고 한다. 아침에는 불을 때서 식구들 밥하고 종일 일하고 또 밤에는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해서 우리들 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러니 언제 편히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었을까? 6·25를 거친 세대들이 대부분 힘든 나날을 견디며 살았겠지만, 특히 여성들의 삶은 등을 바닥에 붙일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다. 엄마는 식성 좋은 육남매를 먹여야 했기에 칼국수를 자주 끓이셨다. 멸치 육수를 내고 쫀득하게 반죽을 하고 밀대로 얇게 밀어서 밀가루를 살살 뿌린 뒤 멍석처럼 말아진 밀가루 반죽을 채 썰고, 탈탈 털어서 끓는 육수에 넣어 저으면, 정말 환상적인 칼국수가 됐다. 시간이 없을 때는 반죽 덩어리를 손으로 뚝뚝 뜯어서 육수에 넣고 수제비를 만들어 주셨다. 큰 솥을 마당에 걸어 놓고 장작불을 떼서 수제비나 칼국수를 끓이고 있으면 냄새를 맡았는지 다리를 절거나 집이 없어 보이는 거지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구걸을 하면, 한 그릇 떠주시면서 잔소리를 하셨다. “몸둥이 좀 움직이믄 먹고 살 것인디 신체 멀쩡한 양반이 왜 이러고 다니요? 인자 그만 오쇼잉!” 그리고 다리가 불편하거나 불구의 모습으로 구걸을 하면, 아무 말 없이 그냥 한 대접 가득 퍼서 평상에서 편히 먹고 가도록 하셨다. 육남매가 먹기에도 부족한 수제비를 듬뿍 떠서 거지에게 주시면 아깝다는 생각에 우리는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늘 나눠먹어야 인간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개돼지나 밥 갖고 싸우는 거다. 형제간에도 항상 나눠먹고 어려운 사람과 나눠먹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제”라고 말씀하셨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엄마의 말 중, 첫 번째가 ‘나눠먹어라’다.
어렸을 때는 육남매가 자라면서 자주 다투기도 했고, 동네 친구들과도 소소하게 싸우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하시면서 황금을 바다에 버린 우애 있는 형제 이야기를 단골로 해주셨다. 친구와 싸우고 집에 와서 친구를 욕하면 “항시 좋은 말만 해라. 사람을 좋게 보믄 한도 없이 좋고 나쁘게 보믄 한도 없이 나쁜 것이다”라며 꾸짖으셨다. 엄마의 말 중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두 번째 말은 ‘좋은 말만 해라’다.
교육열이 높으셔서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이 공부하고 싶다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어렸을 때는 크레파스조차 살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미대를 간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방과 후 시간에 화선지에 사군자를 그려서 엄마 앞에 펼쳐 보이자, 엄마는 “너 그림 그리고 싶으면 해라”라고 하셨다. 당시의 살림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비싼 미술학원에 다니도록 허락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뭣을 하든지 간에 끝까지 해야 한다. 도중에 그만 둘라믄 시작도 말아야제”라고 하셨다. 나는 그 때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기뻤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게 반복해서 하셨던 세 번째 말은 “꾸준히 끝까지 하거라”다.
엄마는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다. 엄마가 적금을 타서 아버지께 드리면 아버지는 친구에게 빌려주거나 투자한다고 가져가셔서 꼭 날리고 오셨다. 그러면 엄마는 “우리 복이 아닌갑소”하고 금방 단념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각자 복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내용의 옛날 이야기를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해주셨다.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이야기들을 적시에 해주시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루 세 끼다. 사는 거 별 차이 없다”라시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게 하셨던 네 번째 말은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라’다.
어느 날 엄마가 울고 계셔서 함께 울었던 적이 있다. 그냥 엄마가 우는 모습만으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나오고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엄마…”하고 보듬고 우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느그들은 꼭 느그들 인생을 살그라이…”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의 깊은 뜻이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았다.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집을 나가고 싶어도 배운 것도 없고, 줄줄이 딸린 육남매가 눈에 밟혀서 매일 매일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하셨던 그 날. 그 때 딱 한 번 들었던 ‘느그들 인생을 살아라’라는 말이 엄마가 내게 주신 다섯 번째 말이다. 갑자기 오래된 수첩에 메모된 엄마의 말을 정리해보니 이토록 큰 지혜가 담겨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