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누가 이겼어요?” 나의갑 |
| 2018년 05월 09일(수) 1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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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말 가운데는 “이뻐 죽겄다”는 찬사가 붙는 말들이 ‘솔찬허다’(꽤 많다). 질문 하나, 이 둘 중 어느 게 대한민국이 자격증을 내준 표준말일까? 답은 ‘이쁘다’다. 국립국어원이 2015년 12월 ‘이쁘다’도 ‘예쁘다’와 뜻이 같은 복수 표준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귄(귀염성)이나 게미(깊고 은근한 음식 맛), 늑삼내다(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더욱 힘을 내다), 비민히(어련히), 끼데(상대의 행동이 못마땅해 불만을 나타내는 말) 같은 말은 아직 축에 못 끼었다. 1999년 이후 국어원은 사투리이지만 표준말에는 없고, 그게 널리 쓰일 경우 표준말로 쳐주고 있는데, 어감이 표준말보다 귀여운 데가 있어 보이므로 전라도 토종의 전국화가 기다려진다. 말의 경제성은 또 어떤가. 말하는 입의 노동을 덜어주고 있다. 대체로 ‘전라도것’이 표준말보다 발음하기 편하지 않은가. 전라도 입이 좇는 경제성이다.
5·18은 말한테도 고통을 주었다. “광주가 끝난 뒤 군대 간 사람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그놈의 말 때문에 ‘전라도것’으로 뽀록나 빨갱이 취급을 받다시피 했고, 선임들한테 맞을 때도 우수로 더 맞았다니까요.” 지지리도 군대 복 없는 사람들의 평균치 증언이다.
잠시 샛길로 샌 듯 싶으나, ‘나수’를 떠올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금남로에는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인도에 나수(많이) 줄지어 서 있다. 금남로가 5월 광주의 최대 상징이라면 은행나무는 ‘묵언의 수행자’다. 최루가스도 먹고, 사과탄도 맞고, 더러는 현대 과학이 날카롭게 빚어낸 M16 소총 맛도 보았다. 사지가 쭉 찢어진 부상자도 있었다. 사람들이 어린 가지에까지 올라타다 보니 중상을 당한 거다. 나무는 아팠다. 허나 눈물 하나 콧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때론 밀물처럼 밀려가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무는 제 위치를 지키며 그 씩씩한 잎새로 함성만 질렀을 따름이다. 그는 그러므로 금남로와 동지관계를 갖고 있다 할 것이고, ‘금남로’에다 ‘은행나무 잎’을 얹어 잘 버무린다면 5·18 상징물로 손색이 없을 거란 생각이다. 5·18이 38년이란 시간 위에 걸려 있는데도 요런조런 상징물 하나 없는 광주이지 않은가.
노래가 있었다.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80년 광주보다 두 살 더 먹었다. 느닷없이 왜, 오래된 노랠 들고 나오는가. 노래가 꼭 그 봄 같아 불러왔다. 노랫말이 그렇고, 선율이 그렇다는 거다. <지나간 자욱 위에 또다시 밀려오며/ 가녀린 숨결로서 목 놓아 울부짖는/ 내 작은 소망처럼 머리를 헤쳐 풀고/ 포말로 부서지며 자꾸만 밀려오나/ 자꾸만 밀려가는 그 물결은/ 썰물 동여매는 가슴속을 풀어/ 뒹굴며 노래해 뒹굴며 노래해…> 광주가 무너진 뒤, 도시는 그 ‘은유’를 틀어놓고 밤새 뒤척였다. 도시의 파도는 거대했고, 핏빛 포말로 부서졌다. ‘자꾸만 밀려가는’ 그 파도는 ‘뒹굴며 노래’했다. 광주의 귀에는 조각난 저항을 일으켜 세우려하는 것처럼 들렸다. 바람 든 무시(무)같이 숭숭 구멍이 뚫린 도시의 가슴을 흔들어 놓으며….
이 노래, 저 은행나무와 함께 ‘사용법’에 대해 고민해보면 어떨지, 작은 생각을 내놓는다.
그날의 함성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금남로, 훌쩍 커버린 은행나무, 이 둘과 입때껏 가슴으로 어깨동무하는 파도의 노래. 광주의 5월은 길다. the longest month다. 왜 그런가. 그동안 세 번(1988-1989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1995-1997년 12·12 및 5·18사건 검찰수사·대법원 판결, 2005-2007년 12·12, 5·17, 5·18사건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 2017년 국방부 5·18특조위의 조사는 제외)이나 5·18을 조사했지만, 헛다리 짚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되레 긁어 부스럼 낸 꼴이랄까, ‘전두환 회고록’이나 지만원 등 극우 쪽에 밥만 대주었다는 거다. 작년에 발간된 회고록 1권(5·18 관련 기술 377-542쪽)을 보자. 밥에 해당하는 인용문을 일일이 세어 보았더니 자그마치 76개에 이르렀다.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그 셋을 즐겨 사용했다 함이다. 가꾸로 말하면, 발굴해야 할 5·18 진실이 76개에 달한다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광주의 5월은 the longest month다.
목마른 광주에 비가 내렸다. 올 2월 사실상 처음으로 진상규명용(用) 특별법이 제정된 거다. 그리고 오는 9월14일이면 그 특별법을 근거로 진상규명조사위가 출범한다. 조사 대상이 5·18 단독임은 물론이다. 전에는 의붓자식 같은 취급밖에 받지 못한 5·18이었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가면 하얀 뭉게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 한 이팝나무 꽃 뭉치가 눈부시다. 몽실몽실 금남로를 뒤덮은 최루가스로 장면이 바뀌는 이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팝나무처럼 아주 하얗게 5·18을 그려내려면 어째야 쓸 것인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캐내기 위한 물음이다. 진상규명특별법 시행령이고 뭐고, 최우선은 사람이다, 사람 속에 있다는 게 내 믿음이다. 5·18진상조사위 인적 구성(9명)에 성패의 답이 있으므로 이걸 놓치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그 사람의 ‘살아온 흔적’에다 도수 높은 돋보기를 대야 한다는 주문부터 해둔다. 누구든 그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위원장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흔적이 별로 안 좋은 위원장 한 사람의 가치시스템과 역사인식이란 ‘시작’이 거대한 ‘결과’와 직결될 수 있다 함에 주의가 요구된다는 거다. 위원장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면 어쩔 것인가.
얼마 전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선생님, 누가 이겼어요?” 아이의 물음에 광주는, 대한민국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