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자리는 ‘일자리’가 아닙니다 나의갑 |
| 2018년 09월 30일(일) 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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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기만 하다. 무슨 팸플릿 같은 것도 그렇고, 겉장의 색깔이란 게 먼 시절 어른들이 피우던 봉초 봉지같이 어둡게 누런 것도 그렇고, 작품명이 ‘분수대 앞에 선 낯선 사람, 2018’이란 것 또한 그렇다. 도대체가 비엔날레 출품작다운 구석이 없다. 그 낯선 풍경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 1층 로비의 1단짜리 책꽂이에 오도카니 꽂혀 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세 수정되어 작가한테 “시피 봐서 죄송하네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진다. 작가(호주 멜버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가 톰 니콜슨)의 말을 읽으면 그 낯설음이 금방 가시고 대신 깊은 울림이 샘물처럼 차오른다는 것이다. 작가는 5·18 때 생산되어 기록관에 보관 중인 선언문 15편(‘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등)을 A4 용지 두 장 크기에 새까맣게 버무려 놓은 걸로 작품을 끝내지 않는다. 사람들을 다소곳이 분수대로 불러낸다.
1980년 봄, 도청 앞 광장의 분수대는 그냥 물이나 뿜어 올리는 분수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연달아 그 꼭대기로 올라가 ‘의로운 저항’을 쏘아 올린 ‘광주의 큰 입’, 그거 아니었는가. 작가는 그걸 “집회 기간에 연사들은 군대로 인해 완전히 고립된 광주 너머로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이 15편의 글에 담긴 단어들은 분수대 앞에 모였던 수천 명의 인파를 넘어, 그들이 도달하고 싶었던 상상 속의 청중에게는 그 얼마나 살아 숨 쉬는 말이었을까요”라고 뭉크처럼 절규하며 “분수대 앞에서 큰 소리로 발화될 것”을 요청한다. 그 ‘발화’를 위해 작가는 “이 책자를 들고 분수대로 가셔서 이 책에 실린 15편의 선언문을 낯선 이에게 건네주세요. 여기 적힌 글들은 당신만의 언어로 타인과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하나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라고 주문한다. 이국인 작가의 이 기지 넘치는 ‘5·18 생각’에 나는 내가 심하게 부끄럽다. ‘니가 언제 한번 니 생각 속에 5·18을 넣어 봤냐’고 자문하면서 작아지는 날 본다.
43개국 165명의 작가가 참여해 300여 점을 선보이는 2018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은 오는 11월11일로 막을 내리지만, ‘분수대 앞에 선 낯선 사람, 2018’은 마감 일자가 따로 없다. 5000부나 되는 작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어간다. 만약에 작가가 비엔날레가 끝날 때쯤 기록관에 와, 남아 있는 작품을 확인한 뒤 머릿속으로 그릴 ‘광주그림’이 솔직히 걱정된다. 그의 요청대로 분수대로 가는 이들은 또 얼마일 것인가.
전시를 시작하는 날, 작가한테 물었다. “작품에다 선언문 글자를 읽을 수 없을 만큼 이거저거 포개어 놓아 마치 새까만 종이 쪼가리 같이 보이는데, 무슨 메시지라도 담겨 있는가요”라고 했더니, ‘금남로의 함성’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해 봄, 함성 한번 안 지른 광주 사람 있었던가. 낮에서 밤으로, 밤에서 낮으로 함성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시한 뒤 내 생각을 얘기했다. “작품을 새까맣게 처리한 건 5·18로부터 38년이 흐른 지금에도 ‘분수대의 함성(선언)’들이 빛을 못보고 갇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둠에 묻혀 있는 5·18 광주, 작가의 작품보다 더 새까만지도 모른다. 5·18진상규명특별법에 따라 설립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그 광주의 발굴자로 나서게 된다. 진상조사위원들이 아직 다 뽑힌 건 아니나 주문부터 해둔다. 조선 사관들은 죽음이 예견되는데도 붓을 꺾지 않았다. 성종 때 사관 김일손도 그랬다. 세종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가 ‘대역부도한 행위’로 몰려 죽음을 만났다. 조선 사관들처럼 ‘사관정신’으로 무장하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또 진다. 5·18을 만든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 그리고 전두환의 협력자들을 이겨낼 수 없다. 당신들의 조사 결과가 가감 없이 5·18 역사로 남게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 일이다. 당신들의 손끝 하나로 5·18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음 아닌가.
그러니 그 자리는 아무나 하는 ‘일자리’가 아니다. 조사결과가 잘못 나오면 ‘전두환 회고록’보다 더한 독설이 발간될지 모를 일이라 함에도 주의가 머물러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진상조사위원들에 대한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광주가 고민해야 할 시점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