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인’의 세월 70년 주홍 |
| 2018년 10월 18일(목) 18:46 |
|
10월이다. 푸른 하늘과 풍요로운 들판이 펼쳐지는 10월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정취를 발산하는 계절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일어난 국가폭력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70년의 세월동안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정치 상황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의 힘에 의해 우리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척결되지 않은 채 미국을 등에 업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쪽만 단독선거를 치르는 것을 반대했던 제주도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내륙의 우리 군이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제주에서 도민들을 학살하게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만들어지자마자 우리군인이 국민을 학살한 것이다. 1948년 혼돈의 대한민국, 여수에 주둔한 우리 군대 14연대 2천여 병사들은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제주파병 명령을 거부한다.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명령을 거부하자, 국가는 10월22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여수진압작전에 나선다. 여수에서 파병을 거부했던 군인들은 반란군(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흩어졌고,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굶주린 배를 채웠으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군인들은 마을주민들을 약탈하고 강간했으며 살해했다. 밤이면 반란군들에게 당하고, 낮이면 군인들에게 당하는 민간인들의 피해상황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0년 5·18을 겪은 광주시민들은 계엄령과 국가폭력에 의한 경험이 있기에 그 낙인찍힌 삶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고 무서운지 잘 안다.
몇 달 전 순천KBS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희생자들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70년 간 ‘낙인’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는데 도움을 청해 왔다. 그 당시에 부모를 잃어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온 여수와 순천 사람들…. 대부분 70이 훌쩍 넘은 분들이고, 그분들을 모시고 광주 메이홀에 오신다니, 나는 밥을 나누고 그림을 그리는 치유프로그램으로 함께 하기로 했다.
70이 넘도록 상처를 안고 견디며 살아온 세월, 그러나 아직도 두려움에, 겪었던 일을 말로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 연좌제에 걸릴까봐 친척조차 받아주지 않은 어린 시절, 생존을 위해 떠돌며 살았던 지난 세월을 다시 직면해야하는 시간이었다.
1980년 5월 임신한 몸으로 주먹밥을 했던 주먹밥아줌마가 기꺼이 밥상을 차려주기로 했다. 그분들이 광주에 오시면 점심시간에 맞춰서 오시고 오월주먹밥을 나눴던 마음으로 ‘오월치유의 밥상’을 차려 먼저 밥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한 식구가 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오월주먹밥아줌마의 솜씨로 갖은 나물 무침이며 홍어와 수육이 차려지고 생김치를 즉석에서 비벼서 손맛과 정성 가득한 남도의 밥상이 차려졌다. 밥상 앞에서 ‘광주의 오월’과 ‘여순의 시월’이 만났다. 주먹밥아줌마는 주먹밥을 동글하게 만들어 70넘은 어머니 아버지들께 내밀며 말문을 열었다.
“1980년 5월에도 전두환이 광주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우리군인들이 광주시민들을 학살했고, 그때 저는 임신 중에 예민한 상태라 그 총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도 힘들어요. 광주는 그나마 진상규명이라도 시도를 했는디…오메, 그 세월을 어찌고 사셨소!” 그러자 밥을 입에 넣은 어른들이 삼키질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렇게 정성껏 차려준 밥상을 생전 처음 받아보요.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였어. 아무도 빨갱이 자석놈이라고 받어주들 안해! 배울 수가 있나, 취직을 할 수가 있나…” 밥을 먹다가 통곡을 하다가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내 뱉기도 하고….
70넘은 어른들이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한 맺힌 사연을 토해냈다. 정말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눈물 젖은 오월의 주먹밥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맺힌 이야기들이 나오게 만들었다. 울면서 밥을 나누고 나서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리며 얼굴을 그리고 자화상을 한 점씩 그렸다. 그리면서 저절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다가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업힌 아이를 할머니가 데려와서 살아났다는 이야기며, 뱃속에 있어서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사생아로 자란 이야기 등 살아난 이야기부터 ‘낙인’ 찍혀 빨갱이로 살아왔던 70년간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그때 여수순천 군인들이 제주도의 우리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 것이 죕니까?”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아니라 ‘여순항쟁’으로 역사에서 정리됐다면 1980년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