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표를 하나 더 달면… 나의갑 |
| 2018년 12월 09일(일) 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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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시도 때도 없이 구장집(이장집)을 들락거렸다. 곳간에 생쥐 드나들 듯 했으니 구장집 식구들이 눈치깨나 했을 것이나,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거기 또래가 있다 함은 구실이었고 노랑쥐 같은 의뭉한 속내가 따로 있었다는 거다. 구장집에는 우리집엔 없는 것이 있었다. 어린 입을 눈부시게 유혹하는 우유가루가 그 ‘없는 거’였다. 1950년대 미국이 남루한 이 땅에 구호물자로 보내준 우유가루. 시간이 길게 지나도록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미제(美製)의 맛에 길들여져 노랑쥐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벚꽃도 바람도 연분홍빛 소리를 내던 날이었다. 아침 일찌거니 구장집에 갔더니 구장 아들의 차림새가 많이 달라 보였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것이 외가에 제사라도 지내러 가나? 입학(1961년 5·16 이전에는 신학기가 4월1일부터 시작되었다)하러 학교에 간다고 했다.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 지고 장에 간다’고 달래달래 구장 뒤를 따라갔다. 구장 아들보다 한 살이 적은 일곱 살이었지만, 그날 나는 덜컥 입학을 당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구장권력’이었다.
담임선생과 구장이 낼부터는 왼쪽 가슴에다 ‘이름표’와 ‘수건’을 달고 나오라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 ‘낼’을 못 지키고 며칠 뒤, 이름표는 무학(無學)을 마치 프라이드인 것처럼 병기로 활용하며 자식들의 공부를 다스린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을, 수건은 가제수건같이 기계제(製)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가내수공업으로 어머니가 생산한 무명베 수건을 달고 나갔다. 내 이름표가 고장 나 있는 걸 안 건 담임선생이 출석을 부를 때였다. 출석부 한번 보고 얼굴 한번 보고 그런 식으로 출석을 부르던 담임선생이 맨 앞에 앉아 있는 내 이름표를 보더니 이상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출석부에는 ‘나의갑’으로 나와 있는데 ‘나이갑’은 뭐냐는 것이었다. 내 이름자는 아버지가 이웃에 사는 면사무소 직원한테 호적에 올려 달라고 부탁하자 그 직원이 자기 맘대로 개작해 버린 사연을 담고 있다. ‘이갑’과 ‘의갑’. 사람인 나야, 집에서 부르는 이름하고 호적이름하고 다른들 무슨 대수인가?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역사에 붙어 있는 이름표는 단연코 대수다. 5·16을 보자. 지금은 ‘5·16군사쿠데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박정희가 붙인 이름자는 ‘5·16혁명’이었다. 그는 ‘혁명’을 받쳐 주는 힘으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둥 6개 항목의 ‘혁명 공약’까지 만들어 국민들한테 외우도록 강요했다. 첫사랑이 오래가듯, ‘처음’이라는 것에 강한 지속성이 내재되어 있어 그런 걸까. 박정희는 가고 없어도 그가 입력시킨 ‘혁명’은 내 머릿속에 살아남아 있다. ‘5·16군사쿠데타’란 새 이름표가 낯설기만 하니 대수라는 것이다.
양부자(養父子) 관계라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각기 조각낸 역사의 이름표는 같다. 양부의 기술을 학습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쿠데타’란 이름자가 동일하다는 거다. 박정희는 단 한 번에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나, 전두환은 12·12로 시작해 5·17, 5·18 등 여러 단계를 거쳤다. 1997년 12·12, 5·18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그 증거물이다. 5·17, 5·18에 대해 5·17내란, 5·18내란이라고 단정했다는 데 특단의 눈이 머물러야 한다고 본다. 진상규명이란 일을 잘 해내려면 피해자 쪽에서 가해자 쪽으로 관점을 돌려 5·18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다. 이를테면, ‘전두환과 전두환그룹(신군부)의 퇴진,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에서 ‘전두환과 그의 그룹이 미리 준비한 시국수습방안(정권탈취 프로그램)에 따라 실행에 옮긴 5·17내란과 광주는 어떤 관계이며, 그 무지막지한 전두환의 내란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진 광주시민들을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집단사격을 하고 등 광주땅에서 왜 살육을 저질렀으며,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막후공작을 하고 등은 ‘무엇 때문에, 어떻게 했는가 등’ 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자는 얘기다. 확 줄여 말하면, ‘전두환이가 광주에 쿠데타를 일으켜 놓고 무슨 짓을 했나’가 될 것이다. 이름표에는 ‘5·18전두환내란사건’이라고 쓰면 되고. 물론 ‘5·18민주화운동’이란 지금의 이름표를 버리자는 건 아니다.
전두환은 5·18 때 광주에 간 일이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하지만, 광주에서 그 얼굴을 봤다는 사람도 있고, 왔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또 5·18을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전두환 5·18 관련 행적’을 40개 넘게 발굴·분석한 나는 무엇인가? 전두환을 빼놓으면 5·18은 스토리 구성이 안 된다. 전두환이 열쇠라는 말이다.
전두환과 그의 그룹은 자기들이 ‘폭도’이면서 거꾸로 광주를 ‘폭도’로, ‘폭동’으로 둔갑시켜 5·18내란을 완성시키고 정권찬탈을 완성시켰다. 이 진상규명용 이름표를 달게 되면 얼마 후 출범하게 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