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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의 눈과 남의 남편

주홍
치유예술가·샌드애니메이션 아티스트

2018년 12월 13일(목) 19:13

지난해 겨울, 눈 구경을 하러 북해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겨울에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 북해도. 지붕까지 덮은 흰 눈 사이로, 차가 다니는 길만 겨우 눈이 치워져 있었다. 천지를 온통 하얗게 덮어, 파란 하늘과 하얀 눈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 눈.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일상을 마비시킨 눈 때문에 미니멀리즘 작품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눈은 사람들을 천진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뒹굴고 환호하고 미끄러지면서도 즐거워했다. 눈 덕분에 순간 삶이 놀이로 바뀌었다. 눈을 배경으로 원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쁜지, 사람들의 목소리도 시끄럽게 들리지 않고 조화로운 음악소리 같았다. 삿포로 눈 축제의 불빛들과 대형 눈 조형물보다 북해도의 원시적인 자연과 흰 눈이 더 장관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사방 어디를 찍어도 사진작품이 될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남도에도 눈이 내렸다. 대설주의보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언니를 내 차에 태우고 깊은 밤 국도 위를 운전하고 있었다. 폭설 때문에 차선도 보이지 않았고 중앙분리대도 보이지 않아서 비상등을 켜고 기어가고 있는데, 조수석에서 한 숨을 내쉬며 언니가 말했다. “정말 눈이 너무 싫다. 이렇게 앞이 안 보여서 어떻게 집에까지 갈까?”하면서 내일 아침에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울 일을 생각하니 심란하다고 했다. 한 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갈 길이 멀었다. 1시간 거리인데 언제 도착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눈길에 갇히는 건 아닐까? 폭설로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며 겨우 더듬더듬 기어가고 있는데, 폭설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얼마 전 여행했던 북해도는 겨울마다 이 정도의 눈이 15일 이상씩 계속 내려서 비상음식과 연료를 집집마다 비축해야만 겨울을 나고, 매일 아침이면 집 앞의 눈을 치우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라는 말을 들었다. 여행자가 돼서 바라본 눈이었기에 북해도의 눈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다. 언니와 나는 거의 동시에 “북해도에서는 눈이 그렇게 멋지더니”라며 함께 갔던 북해도 여행이야기를 하며 힘든 운전 길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기며 광주에 도착했다.

북해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눈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겠지. 어쩌면 매일 아침 치워야하는 쓰레기와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아름다움을 만든 것이지 눈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은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여행에서 만난 눈은 꼭 북해도의 눈만이 아니라 언제나 아름다웠다. 창밖에 내리는 눈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내리는 눈처럼 나와 관계에서 거리를 두면 아름다워진다.

후배 작가가 얼마 전 오래된 오디오와 스피커를 내놓았다.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사람이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을 싫어해서 이사할 때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좋아하는 물건이라 가끔 와서 볼 수 있도록 우리부부가 구입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남편은 보자마자 구입했다. 오래된 자동차나 오토바이, 오디오 등을 좋아해서 우리 집에는 여러 대의 오래된 자동차와 할리데이비슨 바이크를 비롯한 네 대의 바이크를 소장하고 있다. 아주 가끔 한 번씩 시동을 걸고 타기도 하지만 거의 소장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대의 전축, 즉 리시버와 진공관 앰프가 있다. 그 섬세한 소리의 차이를 느끼며 아침이면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 음악을 틀어준다. 나는 아침에 선곡해서 틀어주는 음악이 참 좋다.

그런데 그 후배가 내게 질문을 했다. “대부분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이 수집취미를 갖고 있는 걸 싫어하는데, 남편의 취미 때문에 자주 다투게 되지 않나요?” “아뇨?” 그렇게 대답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구나. 내가 왜 다투지 않지?’ 나는 함께 즐기고 있었다. “아! 저는 남편이 바이크 한 대를 더 사가지고 오면 그 땐 남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봐요.”

그랬다. 나는 남편이 수집을 할 때마다 ‘내 남편’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남의 남편 보듯 바라보면 정말 멋지다. 오디오를 수집하는 것도, 오래된 자동차를 수집하는 것도 바이크를 폼 나게 타는 것도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멋지다. 그런데 내 남편이 수집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관리자 모드에 빠진다. 자동차 보험을 생각하고 유지비 등 모든 것이 걱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북해도의 눈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도 남의 나라 눈이기에 아름다웠듯, 사랑하는 사람도 타자의 시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여행자의 시선은 우리의 일상을 아름답게 한다. 나는 오늘도 지구의 여행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