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하나PD의 보통날] 캐프리컨 브루스 |
| 2018년 12월 17일(월) 1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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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12년, 문화예술 분야에 처음 발을 디뎌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어떤 계기였는지 오래전 헤어졌던 남자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게 됐다. 워낙 사람들 상담해 주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라 뭔가 의견을 구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여전히 마음이 남아있어서 만남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를 만나 근황토크를 시작했다. “저 요즘에 문화예술기관에서 일해요. 거기에서 프로그램 기획도 하고 시민들 대상으로 운영도 하고요. 참 재밌고 잘 들어왔단 생각이 들어요”하자 그의 말이, “그래? 그런데 글쎄… 하나 너 캐프리컨이잖아. 너 그런 창의력을 요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왜 그를 만나기로 했는지, 어떤 차를 마셨는지, 헤어지는 뒷모습은 자연스러웠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저 대화 뿐.
그는 어스트롤로지(astrology·점성학)를 꽤 진지하게 공부하던 사람이었고 그와 사귀던 시절엔 나도 물론 그의 영향으로 거기에 심취해 있었다. 1월17일 태어난 내 별자리는 캐프리컨(염소자리)이고, 캐프리컨은 흙의 기운이 강해 안정적인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캐프리컨의 주요 키워드는 ‘보수적’, ‘조직적’이다. 캐프리컨에 대한 기본정보가 있고(또는 워낙 캐프리컨인 나를 겪어봤고) 문화예술 분야라 하면 으레 창의력, 창조성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그 둘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상처를 줬고 머리 위를 언제나 겨누고 있는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 ‘흥! 공기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이라던 제머나이(gemeni·쌍둥이자리) 당신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더라? 순 엉터리’하고 가볍게 넘겨버리면 좋으련만 나는 진지한, 너무나도 캐프리컨인 것이다.
‘캐프리컨 협주곡’이란 곡이 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로 익숙한 작곡가 사무엘 바버의 곡이다. 바버는 3월 생으로 캐프리컨이 아니라 어퀘리어스(aquarius·물고기자리)이다. 캐프리컨은 그가 한때 살았던 집의 이름이라고 한다. 겨울에도 빛이 집 안 깊숙하게 들어오는 밝고 따듯한 집이었다고 하는데 바버에게 창작을 북돋는 안정감을 줬다고 한다. 어스트롤로지를 의도해서 쓴 곡은 아니지만 바흐에 대한 오마주(브란덴브루크 협주곡 2번의 악기편성을 따른다.)에서 느껴지는 보수성이나, 세련된 대위법에서 느낄 수 있는 조직성은 마치 캐프리컨의 그 무엇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캐프리컨 협주곡’을 쓴 바버는 보수적인 양식을 고수한 작곡가였다. 20세기 당시 미국에서는 전위음악과 같은 급진적인 음악이 한창 성장 중이었다. 바버의 음악은 19세기 음악언어인 조성과 낭만적인 표현에 뿌리내리고 있었고 비평가들은 종종 그의 음악을 독창적이지 않고 후진적이라며 비난했다. 그의 음악은 신낭만주의 음악이라고 불렸는데, 낭만주의를 구식으로 여기던 당시 분위기에서 결코 명예로운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비난 속에서 자신감과 창작열을 계속 지켜나가는 일 역시 물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노래와 서정성으로 재평가받고 있으며 그는 가장 자주 연주되는 20세기 미국 작곡가 중 한 명이 됐다.
‘캐프리컨 협주곡’이란 음악도, 작곡가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돼줬다는 집 ‘캐프리컨’의 존재도, 그 작곡가가 보수적이었지만 새로운 양식의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점도, 모두 다. 참 마음에 든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첫사랑 이야기를 했다. 역시 학생들에게는 첫사랑 이야기가 최고다. 캐프리컨이 등장하고, 제머나이가 등장하고… 캐프리컨은 캐프리컨 다운, 제머나이는 제머나이 다운 기획자가 되면 되지 않겠느냐고 같이 이야기를 했다. ‘캐프리컨에게 어떤 일은 맞지 않아!’하는 말은 위험하다. 특히 아직 첫사랑 이야기가 제일 좋은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정하나 광주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