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서유진 님의 영전에 바침 |
| 2019년 05월 21일(화) 19:10 |
|
그러나 놀라움은 컸지만 슬픔은 그에 비해 가벼웠습니다. 아마도 몸은 비록 생명이 다하여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영혼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남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버린 그날 밤의 형형했던 눈빛을 그리면서, 동행하며 지나온 날들의 기억을 잠깐 되돌아봅니다.
형은 학업을 마치고 도미한 이후,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우리를 숨 막히게 했던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먼 나라 낯선 객지에서, 더구나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전개했습니다. 백악관 울타리에서 몇몇 동포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태극기를 흔들며 저항했던 기억을 탁주 한잔에 섞어 토로할 때, 당신이 감당해야 했던 고독과 절망적 호소가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1990년대 이후 20년 동안은 미국에서 돌아오시어 5·18항쟁의 진실과 역사적 의의를 해외에 알리는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특히 홍콩, 태국, 캄보디아 등 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 집중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광주시민연대, 5·18기념재단, 그리고 광주시청 등 여러 주체들이 5·18항쟁을 국제화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추진동력의 중심에는 항상 유진 형의 활약이 자리 잡고 있음은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현지인을 넘어서는 언어능력과 운동역량을 형은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단 한 푼의 대가도 없이 형은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인상적인 운동사례 하나만 소개하려 합니다. 그것은 스리랑카의 실종자유족회 조직운동입니다. 실종자유족회 조직운동은 정치폭력에 의해 희생된 3만명 이상의 실종자 유가족들이 중첩된 폭력에 의해 피해 받고 억압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가족의 조직된 힘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테러가 일상화된 스리랑카 현지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운동조직을 외국인이 홀로 주도한다는 것은 생명의 위험을 안고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은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2년 넘게 현지에서 활동하여 마침내 유족회 결성대회를 성공시켰습니다.
수시로 만나왔던 이 시기에 형은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광주의 5·18을 세계사적 민주항쟁으로 자랑스러워했고, 이를 아시아 여러 나라에 알려서 그곳의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아울러 청소년활동가들과의 만남을 즐겨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소년과 동행하는 여행을 통해서 이들을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킨 사례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후배와 벗들 그리고 청년활동가들이 보여준 존경의 헌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시 형을 그려봅니다. 이승에 머무는 동안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가정이나 권력도 없이 이 세상을 주유해온 삶, 탁한 세상의 온갖 유혹과 향락도 뿌리치고 맨홀몸으로 외롭게 걸어온 삶을 생각합니다. 오랜 만에 찾아든 삶터에서 단지 두 밤만 지내고 난 이른 아침에, 씻은 몸으로 조용히 자리에 누워 편하게 떠난 형의 죽음을 안도합니다. 척박한 전라도 땅에서 푸르고 아름답게 피어난 들꽃 한 송이 조용히 저물어가는 황혼을 생각합니다. 이제 형의 몸은 진정 해방의 길에 들어섰고, 형의 정신은 우리 마음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태어남이 축복이듯이 죽음도 축복일 수 있음을 새깁니다. 영면안식하소서.
‘아으형제들’의 뜻을 모아
나간채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