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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해야 할 건 뭣이고 내줘야 할 건 뭣인가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2019년 06월 09일(일) 19:04

그해 봄, 광주가 꽃잎처럼 지고 열나흘 째 되던 날(6월10일)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의 국무부 장관한테 3급 비밀을 타전한다. ‘광주 폭동(KWANGJU RIOT)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하 ‘증언’)이란 제목(미대사관에서 달아 놓은 제목이라 함에 유의해야 함)을 붙인 그 기밀문서는 들머리에 이례적으로 ‘의견’을 달고 있다. “본 증언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 중 가장 균형 잡힌 기록과 분석”이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에서 그 의미가 장대하다 할 것이다.

‘내부자’가 누구인지는 얼른 그려지지 않는다. 23년 전 미국 국무부가 광주시의 요청을 받고 기밀문서를 내줄 때 ‘내부자’의 이름을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아까 그 들머리에서 “이 지역을 오랫동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사건 기간 중 계속 광주에 체류했고” 대목은 살려 두고 있어, 일단 광주 밖 사람으로 좁힐 수 있다. 또 A4 용지 26쪽에 이르는 ‘증언’을 끝까지 읽다 보면 그가 ‘미국인 선교사’란 걸, 거주지가 ‘양림동 언덕’이란 걸 알게 된다.

아무튼, 이 ‘증언’은 5·18 이후 생산된 것들 가운데 광주 현지를 포함, 국내외 통틀어 최초의 ‘5·18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내부자’, 그의 관찰은 예사롭지 않다. 민완기자의 감각으로 광주의 비극을 취재하고 있어서다. 그의 눈은 ‘하늘’도 놓치지 않는다. 명색이 기자라는 나는 그 봄날, 요란스럽게 깨진 광주의 하늘을 낙종했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5월21일 수요일자에서 그는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으면 헬리콥터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음. 그러나 실제로 총격이 있었을 때 엄청난 분노가 일었음”이라고, ‘헬기사격의 팩트’를 간명하게 적시한다.

작년, 그러니까 38년 만에 발굴된 이 ‘증언’은 5월3일 광주지방검찰청 형사1부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死者)명예훼손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객관적 증거의 하나로 채택할 만큼 위세를 떨쳤다.

‘증언’은 ‘공산주의’를 단칼에 잘라 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5·18 사건(THE MAY 18 INCIDENT)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도, 공산주의의 침투에 의해 발생한 것도, 공산주의에 오염되어 발생한 것도 아님”이라는 데 부족함을 느꼈는지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단언한다. 그 다음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슬퍼지고 만다. 여태껏 ‘몰라 버렸던’ 것을 ‘증언’이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도시를 재점령한(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 병력들이 공산 반란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이란 게 그것이다.

질문 하나 던진다. ‘공산주의’를 제일 먼저 써먹은 사람은 누군가? 그것도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5·18이 끝나고 여드레가 되던 날(6월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미국 상공회의소 대표단과 만나 저녁을 같이 한다. 광주 문제를 묻자 전두환은 “22구의 시신에 대해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들은 전부 북한 간첩이라고 했다”고 6월1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3급 기밀문서에 나와 있다. 2017년 4월 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도 북한 개입설이 정답인 것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미국은 애초부터 “이상한 움직임은 없다”고 관찰하고 있었다.

‘증언’은 말미에서 ‘기억 2’를 요청한다. 그 하나는, 광주는 절대 폭동에 휘말린 도시가 아니었으며, 이른바 폭도들로부터 시민들이 위협을 받지도 않았음. 둘은, 광주는 학생들 또는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위험하게 장악된 도시가 아니었고, 위기를 맞아 단합된 도시였음.

‘내부자’는 아마도 2015년 작고한 아놀드 A. 피터슨 목사인 거 같다. 그가 1990년 2월 작성한 증언록 ‘5·18 광주사태’(1995년 번역·출판)와 엇비슷한 데가 있어, 그런 추정을 해보는 것이다. ‘헬기사격’ 대목에선 그 단서가 두렷하게 잡혀온다.

5·18 당시 광주와 전남 땅에 와 있던 미국인 중엔 ‘내부자’ 같은 선교사 말고도 평화봉사단원이란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 또한 ‘내부자’처럼 ‘국익(國益) 옹호’란 조국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헬기나 비행기 같은 날것을 대주며 광주에서 떠나라 해도 끝까지 남아, 피 흘리는 광주를 닦아낼 정도로.

모든 외교의 중심에는 ‘국익’이 적용된다. 5·18 때 미국도 그러했다. 카터한테 ‘인권 대통령’이란 별호가 붙어 있었지만, 우습게도 인권은 뒷전이었고, 안보와 경제라는 국익이 더 중시되었다. 미국이 보기에 그런 점에서 전두환은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하자가 커 다루기가 편했을 법도 하다. 미국이 전두환의 광주학살에 협력한 배경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꿈에 나올까 싶은, 겁나는 빚을 광주에 졌다. 그 빚, 39년이 흘렀으니 옛날 옛적 고리짝 빚이다. 빚은 관 속에서도 갚는다고 했다. 빚 준 상전이요 빚 쓴 종이라 했다. 미국의 역사에 빚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일의 미국을 5·18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짐을 덜어주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 또한 미국의 국익이 되려니….

빚 갚는 데에도 질서라는 게 있다. 말로 해야 할 것이 있고, 내줘야 할 것이 있다 함이다. 잘못했노라고 사과부터 하라. 그 다음에는 5·18 진상규명에 필요한 미국 기밀문서를 원본 그대로 한국에 전하면 된다. 광주와 처지가 비슷한 아르헨티나엔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사과 방문까지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미국은 5·18 때문에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