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나PD의 보통날]홍보물 브루스 정하나 광주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담당

2019년 06월 24일(월) 18:27

기획은 책의 목차를 만드는 일이라고 새내기시절 정PD가 이야기했던가? 요즘 짙게 드는 생각은 책의 목차를 만드는 일이 기획이란 일의 성격이라면 조율을 하는 것,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조율해 내는 것이 기획이란 일의 임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획자는 항상 조율하는 사람이다. 연주자가 연주하고 싶어하는 프로그램과 공연 전체 컨셉 사이를 조율하는 일을 한다. 어떤 음악의 완성을 위해 물리적으로 필요한 연습량과 우리 오케스트라의 소화 가능한 연습량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 조건을 조율한다. 날짜와 장소를 조율한다. 오케스트라의 요구와 관객의 요구를 조율한다. 오케스트라와 관객의 만남을 조율한다. 조율한다. 조율한다. 그렇게 기획자의 무수한 조율을 통해 어떤 접점상태의 공연이 탄생한다.

공연제작에서 중요한 한 단계인 홍보물을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홍보담당자는 본인의 해석과 홍보전략을 홍보물에 반영하기를, 디자이너는 또 그 나름의 안목과 실력을 홍보물에 녹이려 할 것이다. 참여주체들의 각기 다른 의견과 취향 사이에서 기획자는 스스로 세운 컨셉과 그동안 무수한 조율을 통해 완성된 공연의 실체가 홍보물에 잘 담길 수 있도록 또 다시 조율을 해 나가야 한다.

때론 ‘홍보물 제작은 내 일이니까, 당신은 의견을 낼 수 없어’라고 하는 홍보담당자나 디자이너를 만날때가 있다.(상대가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는 공연기획의 어느 단계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이럴땐 조율자체가 불가해진다. 조율을 하는 것이 기획자의 임무인데, 임무가 사라지니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업무를 정상화 하기 위해 그런 태도의 업무 담당자와 관계를 조율하는 것도 역시 기획자의 임무다.

개인적으로 홍보물 제작에 굉장히 공을 들이는 편이다. 홍보물은 공연과 관객이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홍보물을 통해 관객은 앞으로의 공연을 상상하게 된다. 홍보물은 1차원의 콘서트 장이다. 공연기획자로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무대인 것이다.

‘이것은 내 영역이야’하는 조율불가의 관계를 설정하는 홍보담당자나 디자이너를 만났을 경우, 혹은 그들과 어떤 사유로 충분한 사전 교감을 갖지 못했을 경우 (솔직히 기획자인 나의 입장에서) 반드시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2번’과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를 엮어 ‘여행이 음악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를 제목으로 공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 첫 번째 곡은 음악의 도시 만하임 여행을 통한 모차르트의 음악적 성취이며 두 번째 곡은 표제 그대로 여행을 좋아했던 멘델스존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착수한 작품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홍보물에는 도시의 풍경을 담거나 혹은 공연 제목과 어울리게 학구적이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공유되지 못했고 전혀 예상밖의 시안이 도착했다. 하필 플룻 협연자가 캐주얼한 의상에 플룻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는데 홍보물 디자이너가 그것을 연주자가 짐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여행을 나서는 듯한 분위기로 가공을 한 것이다. 디자이너와 급하게 조율해 다른 디자인으로 최종 인쇄가 됐지만, 만약 그 시안이 채택이 됐다면 관객들은 ‘여행이 음악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를 ‘플루트 연주자가 어디 수행을 가서 득음을 했나봐’ 정도로 연결지어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반면 기획자와 홍보담당, 디자이너가 사전에 충분히 교감을 하고 홍보물 제작의 최종적인 방향성에 합의를 했을 땐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 그리고 그 이상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얼마전에 진행했던 현대음악으로만 선곡됐던 연주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패러디해 포스터에 기본적인 정보만 남기고 사진이나 그림 등 디자인을 과감히 생략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자체로 현대음악의 철학과, 공연의 주제의식을 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홍보담당과 디자이너는 현대음악의 난해함을 나타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넣기를 원했고 , 마지막에 홍보담당이 백지에 공연정보만 있는 디자인과 같은 구도에 현대음악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들어간 디자인을 양면 인쇄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리고 만장일치로 채택! 양면으로 인쇄된 포스터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되며 공연에 활기를 줬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공연의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며 그 모든 과정에서 다양한 참여자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기획자에게 좀 더 큰 권한이 주어진다면 좋겠다. 그럼 일이 훨씬 수월하고 처음계획과 나중의 결과물이 통일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은 권한을 갖고 여러가지 퍼즐을 맞춰 가는 것도 나름 재밌긴 하다. 역시 마조히스트?

그나저나 그동안 제작했던 홍보물 중 특별히 애정하는 홍보물이 있다. 2013년 원주다이내믹페스티벌 사무국에서 시민기자단과 함께 만들었던 ‘축제일보’다. 그러니까 9월1일 축제현장을 기자단이 취재하고 오후쯤 기사를 써오면 다함께 기사를 선택, 헤드를 뽑은 뒤 디자이너와 함께 지면을 편집 하고 인쇄소에 넘긴 후 퇴근을 한다. 그리고 아침에 신문을 찾아와 다음날 9월2일 아침부터 관객들에게 배포하는 식이었다. 1단 접지의 4페이지 타블로이드 판, 흑백으로 인쇄를 했고 신속하게 만들고 배포하기 위해 복사집에서 대량 복사를 해 와 기자단이 아침에 모여 손수 접어 신문을 완성했다. 수입지, 모던한 디자인, 금박이나 부분 코팅과 같은 고급스런 후가공, 세련된 제본방식 등 지금 홍보물 제작을 할 때 중요하게 따지는 조건들과는 전혀 무관한 제작방식이었지만 내 홍보물 제작인생 최고의 홍보물로 꼽고 있다. 역시 얼마든지 조율가능한 열린 분위기 속에 한 마음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최고. /정하나 광주시립교향악단 공연기획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