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치료사 정유진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이 이끌어주는 기억의 여정’ “말로는 열리지 않던 기억들 음악 통해 쏟아져 나와”

2020년 04월 08일(수) 18:24

정유진 바이올리니스트

보스톤에서는 지하철을 T(티)라고 부른다. 호선은 색깔로 정해서 블루라인, 레드라인, 그린라인이라 한다.

뮤직테라피(음악치료)를 전공하던 미국 유학시절의 나는 마지막 학기에 SHERRILL HOUSE(쉐럴하우스)라는 요양센터에서 인턴십을 했다. 노년의 알츠하이머, 치매 혹은 중증 노인들의 재활센터인 쉐럴하우스는 레드라인 종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종점의 정류장과 오버랩되는 묘한 느낌이 마음을 파고들곤 했다.

음악치료에도 전문분야별로 나눠지는데 예를 들면 음악치료와 자폐, 장애인, 재활, 병원세팅, 치매 등이다. 그 중 노인과 치매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치매에 관련한 논문들을 찾았고 그 안의 공통점은 ‘음악이 뇌의 여러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에 치매에 도움을 줄 수 있다’였다.

음악이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기억력 재생을 도우며 친밀감을 형성해서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기대보다 많았고 또한 진행되고 있었다.

5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전공했고 음악 속에 살아온 나였지만 ‘치매에 음악이 미치는 영향이 정말일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빛과 확신을 가지고 나가서 음악으로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쉐럴하우스에서의 인턴십 동안 치매환자들과 음악으로 만나고 소통하면서 설마 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음악의 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됐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자신이 좋아했던 노래를 듣더니 옛 기억의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움직임이 없던 휠체어의 환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자신이 걷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일어나서 말이다.(그러나 넘어지면 큰일 나니 서포터가 늘 보고 있다가 잘 잡아줘야 한다)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딸의 이름을 부르며 순간의 기억을 찾고, 우울증이 심한 할머니가 소리 내며 웃으며 인사를 한다.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는 환자가 가사를 완벽하게 따라 부르는 등의 일들은 나를 여러 번 아니 수십번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켰다.

미국 보스톤 버클리음대 음악치료(Music therapy) 전공생들.

가족의 이름도 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때론 잊어버리는 중증 치매환자들이 노래의 멜로디 그리고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있는 기적은 뇌에 있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서 얻은 기억들 혹은 몸으로 자극하는 것보다 음악은 더 많은 뇌의 부분들을 자극하기 때문에 뇌는 음악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노래 가사는 언어이니 측두엽을 자극한다면 연주모습을 보는 일은 후두엽, 육체의 동작 기억을 담당하는 소뇌 등 우리가 음악을 듣는 동안 많은 부분의 뇌가 일을 한다.

쉐럴하우스는 음악치료사를 풀타임 직원으로 고용한 곳으로 유명했다. 호스피스와는 조금 다른 곳이지만 고령의 노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분, 때로는 더 많이 정든 분들의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같이 겪어야 했다.

음악치료사들은 전문지식 습득은 물론 기타, 피아노 그 외 다른 악기 그리고 노래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일은 아침음악, 점심 후 그리고 해질 무렵의 음악세션을 디자인하고 이끄는 활동들이었다.

몸이 힘드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기 힘들어하며 활동이 부족한데 아침 라이브 음악으로 움직임을 유도하며 운동하는 시간을 갖는다. 점심 후 나른하고 지루함을 달래는 데는 다양한 뮤직테라피 프로그램이 있다. 우울증이 심하신 분들은 1:1로 뮤직테라피스트와의 상담을 동반한 음악세션 프로그램이 디자인되고 층별로 단체그룹의 신청곡 음악연주를 하기도 한다. 해질 무렵의 음악치료는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의 불안함과 혼란을 겪는 치매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5시나 5시반, 해가 일찍 지는 계절의 세션에서 스무분 정도의 그룹을 이끌었는데 휠체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집에 가야해”, “우리아기 어디 있지?” 라고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일들을 많이 봤다. 한분 한분의 이름을 부르며 긴 인사가 끝나면 기타와 바이올린으로 신나는 곡들을 연주하며 노래했다. 그러면 음악은 그 어려움의 시간을 즐거움으로 덮어주곤 했다. 앞서 말했듯이 음악은 옛 기억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미국 환자들의 선호 레퍼토리는 아주 많은데 그중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곡들로는 ‘God bless America’(갓 블레스 어메리카), ‘Edeweiss’(에델바이스) 등이 있었다.

에델바이스를 연주하던 날은 가족들의 방문이 허락된 세션 이였다. 본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모 옆에서 손을 잡고 다양한 감정의 표정을 짓는 가족 혹은 자식들이 함께하는 날이다.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에델바이스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시더니 갑자기 “It was my wedding song”이라고 말했다. 내 결혼식에서 불리었던 노래야, 하더니 순간 기억이 돌아왔는지 딸을 부르며 안아주시기도 했다. 딸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노래를 연주할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더라도 허밍으로 따라 부르고 음악에 춤을 추는 분들 그리고 특히 즐거운 시간은 옛 이야기를 하는 시간들이었다. 음악을 통해서 옛 기억으로 가는 길은 마치 지름길 같았다. 대화로 노력해도 안 되는 기억들이 음악을 통해서는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나의 1:1 클라이언트인 102세 흑인 할머니는 우울증이 심해서 매일 인생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음악을 연주하는 내내 웃음을 보이면서 옛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움직이지 못해 누워있는 백인 할머니는 바이올린을 너무 좋아한다면서 연주하러 방으로 와달라고 청하곤 했는데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면 곡의 제목과 악장까지 정확하게 말씀했다.

음악을 전공하면서 무대의 연주보다 치매센터에서의 연주가 좋았던 건 음악으로 마음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여행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한국 곡을 소개하며 연주하는 시간을 가질 때는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국에 있는 듯한 상상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기억은 희미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가? 즐겁게 듣는 그 음악들이 뇌에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원한다면 언젠가 우리를 원하는 기억의 여정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정유진은...
전남대 음대 졸업 (바이올린 전공) , 이화여대 대학원 졸업 (바이올린 전공) , 미국 버클리음대 졸업 (Berklee college of music, 음악치료 Music therapy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