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훈의 일본작가 비평](12)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생존권 외치는 조선인들 치열하게 묘사한 ‘행진도’ |
| 2020년 04월 23일(목) 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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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도키코가 조선인 여성 박영생을 만나 인간적으로 교류의 정을 나눈 것은 1926년(21세).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체험을 ‘외국인과 관련한 수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은 12년 후(38년)였다.
한편 작품 ‘행진도’에서는 작가가 직접 말미에 ‘1931년 이른 봄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1934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문학평론’에 공개한다.
그러고 보면 1926년의 조선인 교류체험이 마쓰다의 체내에 착근해 있다가 현재화(顯在化)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 작가는 그런 체험과 증언에 근거해 일본 내지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빈민층 조선인들의 실상과 힘겨운 일상을 조명했을 터.
마쓰다가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쌀 내놔라’ 운동에 참가한 것은 1932년. 이처럼 30년 전후 조선인과 동행한 일련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마쓰다가 조형한 ‘행진도’의 조선인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데모 행진’과 유사한 풍경이 ‘행진도’에서도 펼쳐진다. 허나 작가는 ‘데모 행진’보다 조선인 군상의 투쟁양상을 더욱 섬세한 필치로 묘파한다. 그 점을 의식하면 마치 본편을 능가하는 예고편을 접한 느낌이다.
‘행진도’는 ‘데모 행진과 같은 ’자전적 체험기는 아니다. 작가가 봤음직한 사건을 작품화한 단편소설이다. 무엇보다 조선인의 일상과 심리를 꿰뚫는 생생한 장면이 작품의 백미. 일제강점기 일본 작가가 조선인을 바라보는 애절한 시선과 애틋한 심성이 묻어난다. 그러기에 독특하다.
당시 일본 작가에게 실은 조선인을 그리는 자체가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탄압의 영향 등 외적 요인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의식 또한 문제였기 때문.
“(일본)프롤레타리아 작가라고 하더라도 전능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그리려 하면 무의식중에 권력의 언어나 내셔널리즘의 감각이 배어나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혹은 역으로) 생각지도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게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다카사키 류지, ‘문학 속의 조선인상’)라는 언급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재일동포 1세대 작가 김달수도 “작가의 주관적 선의와는 별도로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해서는 어딘가 항상 따라붙어 벗어나지 못하는 그 대국주의적 감각이 (느껴져서) 견딜 수 없다”(김달수, ‘구로시마 덴지 전집’)고 토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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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쓰다 도키코의 조선상에는 이러한 비뚤어짐이나 뒤틀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지도 않았거니와 조선에 거주한 적(고모는 거주)도 없는 마쓰다가 본 조선이기에 의미가 각별하다. 이는 동시대의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이 지향한 공통분모를 해체하고 적어도 마쓰다문학에서는 조선(인)을 상대화하는 쪽으로 재생산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투쟁에 앞장서는 조선인 주인공 ‘류’-
작품 안을 들여다보자. ‘행진도’는 ‘류’(柳)라는 조선인이 잠에서 깨면서 막이 열린다. 이 주인공 ‘류’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우선 눈길을 끄는 대목은 동료 조선인들의 잠든 모습이다.
가장 먼저 깨어 천정의 16촉 전등을 켜고 동료들을 살피는 각성의 인물 ‘류’의 눈에 비치는 동료 조선인들은 어떻게 그려질까.
“동료들은 아직 푹 잠들어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누런 이를 드러낸 김(金), 나이든 노인 박(朴), 정(鄭), 그리고 가네코(金子), 하야시(林)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는 젊은이를 포함해 모두 때가 낀 얇은 이불 위로 손발을 드러내고 몸을 팽개친 채 자고 있었다.”
방에 모인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의 관공서인 도쿄시에서 개발을 위해 조선인 거주지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밤 최후의 거주자 모임을 개최했다. 그런 뒤 방에서 그대로 잤다. 조선인 거주지인 판잣집의 한 방에서 빈곤한 그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책을 마련하다가 지쳐 쓰러진 것이다.
소설의 시제는 류가 깨어나 지난밤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조선인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사건의 베일이 벗겨진다. “기한은 임박했으니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라고 걱정하는 박씨에게 (시에서 판잣집을) “철거하러 오면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라고 거칠게 응수하는 김씨. 이런 대화가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작가의 의도에 의한 설정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도입부부터 독자가 류를 주요인물로 느끼기에 지장은 없다. “모두가 부재중에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물음과 “여자나 어린애라도 (동원해서) 물리칠 수 없을까…”라는 대답으로 웃음판이 벌어진다. 하지만 작가는 류만을 웃지 않은 인물로 그리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류는 “폭력청부업자를 고용해 한두 차례 물리치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우리를) 강제로 철거시킬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예측하는 유일한 조선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한데 밤을 지새우며 이렇게 거주자 모임을 개최하고 투쟁의 의지를 불태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조선인의 인권이나 처우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는 시청 측의 제국주의적 행정정책에 있음이 밝혀진다. 시청에서는 조선인들이 옮길 장소도 정해주지 않고 오로지 철거에만 혈안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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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 대한 처우를 꿰뚫어본 견해다. 즉 조선인은 부락민보다도 더욱 하층민에 속했던 것이다. ‘행진도’에서 조선인들이 “지상권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이동할 곳도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내쫓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도쿄에서는 조선인 비취업자 97.2%가 다수의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30년대에 접어들어 노동자의 급속한 증가 현상이 눈에 뜨인다. 그 중에서도 ‘공업 노동자’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마쓰모토 도시로, ‘震災부흥기 도쿄부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인구, 직업 분석’). 여기에서 얘기하는 ‘공업 노동자’는 ‘토공도로’나 ‘토목건축’ 종사자를 가리킨다.
‘행진도’의 조선인들은 도쿄항만 부근에서 일하는 인부들. 작업은 도쿄항만 건너편 강가의 매립지의 노동이 대부분이다. 그곳에서는 ‘제국 도시’ 하수의 ⅓을 처리하는 펌프굴삭작업이 이루어진다.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진흙투성이의 몸으로 노동에 시달린다. 그 부근의 교량공사나 도로공사에 투입된 인원도 적지 않다.
시는 ‘실업구제사업’으로 엄연히 ‘노동소개소’를 통해 조선인 인부들을 고용했다. 그럼에도 거주지를 철거할 때는 아무 대책도 없이 폐품 처리하듯 무턱대고 쫓아내려 했다(마치 미쓰비시중공업이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에게 임금 한 푼 지불하지 않고 맨몸으로 내몰던 예처럼).
역경에 처한 조선인 거주자들의 심경을 마쓰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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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나 마을을 세심히 꾸렸는지 읽히는 내용이다. 오로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으로 구축한 조선인 부락이다. 그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교토의 우토로 마을의 예처럼).
하지만 도쿄시에서는 이동할 장소도 제시하지 않고 퇴거를 명하는 것이다. 시에 분노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조선인들의 시점에 마쓰다의 시점이 명확히 포개지는 이유다. 마쓰다는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조선인들의 생동감 넘치는 대사와 현실을 반영한 소재로 작품에 리얼리티를 불어넣었다.
마쓰다는 조선인들의 분노를 “제기랄, 빌어먹을 놈”이라고 조선어로 표현했다. 누군가 내뱉은 이 조선어를 신호로 류가 선두에 서서 이끄는 투쟁에 조선인들은 합류한다. 모두가 분연히 일어서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판자촌이지만 그들이 일군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