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소설가의 세상읽기]‘밥벌이하는 자부심은 누구의 것인가’ 서른셋 딸 김은화 씨가 말하는 예순넷 엄마 박영선씨의 삶

2020년 06월 17일(수) 19:10

“내가 먼저 엄마를 알아주기로 했다. 그 시작은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주는 일이다. 엄마는 그간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나 생계부양자 같은 호칭은 남성에게만 명예롭게 주어졌다. 나는 여기에 대항해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다고, 아니 살렸다고, 그녀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엄마는 우리 가족의 생계부양자였으며, 진정한 가장이었다고 말이다.”

예순넷 엄마 박영선씨의 삶에 대해 서른셋 딸 김은화씨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연한 기회에 생애구술사 강의를 만나 엄마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딸이었다. 엄마 앞에서 처음으로 녹음기 버튼을 누르던 날, 40여년 동안 제 손으로 밥벌이를 했던 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엄마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임을, 엄마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글에 소개된 책의 표지

엄마는 정말 쉼 없이 일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공장에서 ‘마도매(손바느질)’를 하며 조장도 되고 대의원도 되었다. 결혼하고서 만화 가게를 열어 남편의 월급보다 더 벌면서 집을 마련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손재주를 살려 한복집에서 일했고 파주의 책 물류창고에서 반품 작업을 했다.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떠난 후에는 강화도의 식당에서 열시간씩, 손가락이 굽을 때까지 설거지를 했다. 요양보호사와 간병인 생활 9년 만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을 때까지, 엄마는 일을 쉬지 않았고 집을 마련했으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했음에도 세상은 엄마에게 ‘생계부양자’라는 호칭을 붙여주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며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그 여성들은 가장으로 호명되지 않았다. 가장의 역할은 남성이 짊어졌고 가장의 월급으로 살림하는 역할은 여자의 몫이었으니까. 고로 남편 있는 여자의 일은 생계가 아닌 ‘자아개발’의 목적이거나 ‘사회봉사’로 치부됐다.

이런 성역할의 구분 속에서 여자의 노동은 보이지 않게 됐다. 가사노동은 여성에게 지워진 자연스럽고도 부차적인 일이니 그 가치를 부러 평가할 필요가 없고, 여성의 사회적 노동 또한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기에 생계를 위해 일하는 남성에게 언제든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IMF와 같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는 건 여성 노동자들이었고 회사의 사내커플 중 여성이었다. 남성보다 여성이 먼저 해고되는 이유는 그들이 생계부양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성은 생계부양자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여성은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이 뒤에 있을 것이라 전제된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부양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서 여성을 상상하는 일이 여전히 힘들다.

책에 삽입된 이미지(10대 시절 마산수출자유지역 다닐 때·왼쪽이 영선씨). <출판사 딸세포 제공>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당연시하는 것, 그것이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다. 우리는 생계부양자의 무거운 역할을 짊어진 여성들의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국군병원의 피묻은 군복을 빨면서 두 아들을 키운 옆집 순돌이 엄마가 있었고, 남편이 꿈을 위해 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미용실을 운영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린 해남댁 아주머니가 있었다. 남편과 함께 공사판 인부로 새벽부터 출근하면서도 퇴근하자마자 가족들의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바지런을 떨어야 했던 맹순이 어머니를 알고 있다. 이들은 모두 평생동안 생계부양자였으며 지속적인 가장이었다. 밥벌이의 위대함을 알았고, 그 위대함만큼 구질구질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남성 가장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한 이 여성들의 노동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남편 없이 자식들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식의 모성 신화로 포장하면서도 정작 이 여성들을 진정한 생계부양자라 이름 붙이며 그 노동 경험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이다.

여성 스스로에게도 생계부양자라는 경험은 양가적이다. 김은화씨의 엄마가 그런 것처럼 눈을 빛내면서 평생의 노동 경험을 자랑스럽게 딸에게 털어놓지만, 형제나 자매, 친척 등 주변사람들과 밥벌이의 자부심과 애환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부양자 남성이 없는 여성은 ‘보호받지 못한 여성’이고, 가장 역할을 짊어진 여성은 ‘팔자가 센 여성’임을 인증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여성들은 생계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일을 한다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자아개발’을 위해, 남아도는 시간을 쓰느라,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등등. 굳이 ‘자신까지’ 돈을 벌 필요가 없음을 인식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정미경 <광주여성가족재단 근무·소라넷 다큐소설 ‘하용가’ 저자>

그 허위를 김은화씨의 엄마는 물론 아주 잘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외로워. 남편이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고, 다 자기 혼자야. …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 돼. 내가 주체적인 사람이 돼야 하더라.” 남편과 이혼한 후 이런저런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일을 해왔던 엄마에게, 어떻게 그 과정을 견뎌냈느냐고 딸이 물었다.

누구에게든 버거울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해, 나이 들고 병마와 싸우는 엄마는 이제 말한다. 주체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고. 주체적이라 함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 나 자신을 책임지는 처음이자 끝은 먹여 살리는 것, 고로 우리 모두는 남자나 여자임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생계부양자이자 책임자라는 것, 누군가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강한 존재라는 것, 40년 밥벌이의 위대한 깨달음은 그처럼 단순하다.

그 단순함에 집중하다 보면, 편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 라는 진실 같은 것, 그런 것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