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훈의 일본작가 비평](16)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벗의 죽음을 접해 의지를 불태우다 |
| 2020년 08월 26일(수) 1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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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도키코는 1934년 ‘행진도’ 발표 후 큰 혼돈을 겪는다.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 해산으로 천황제 파시즘은 공고히 뿌리를 내려 진보적 문인들은 좀처럼 나래를 펴지 못했다. 전향을 결정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일본낭만파가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런 허망한 시기에 마쓰다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벗이 있었다. ‘우타고에’ 운동의 창시자인 세키 아키코(關鑑子)의 여동생이자 사회운동가인 세키 도시코(關淑子·1908-1935). 하지만 1935년 초 그녀가 화염에 휩싸여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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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고’에는 하루에(ハルエ)와 도모코(友子)라는 두 여성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하루에는 체내에 둘째 애를 품고 있다. 허나 남편은 노동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경원시한다. 하루에는 현명치 못하다고 스스로 자학할 뿐 남편의 책임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맞닥뜨린 아포리아처럼 느낄 뿐이다. 하루에는 봉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여성상의 표본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한편, 하루에를 방문하는 도모코는 여성운동에 나선 딸의 활동에 노심초사하는 부모와 충돌한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는 부모의 애정과 여성운동가 하루에의 의지가 길항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도모토도 애인의 애를 체내에 품고 있다. 애인이 운동에 방해된다며 출산을 반대하지만 도모코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한다. 결국 유산으로 애를 잃는다. 하지만 출산의 성(性)을 지닌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한 셈. 도모코가 죽은 태아를 안은 병실에 경찰이 들어 닥치고 불온한 애인을 조사한다며 경찰은 그녀에게 낙태라는 죄를 씌운다.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자원이 절실한 일본 제국이 오로지 출산을 독려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죄명을 구실로 삼은 것이다.
작가 마쓰다는 ‘여성의 고통’을 통해 연애와 운동 속에서 고뇌하는 여성 운동가의 모습을 핍진히 그렸다. 자신의 성과 신념을 지키려는 도모코의 모습에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어떻게 고난의 현실을 타개하고 어떻게 투쟁을 펼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헌데 이 소설 속에서 도모코의 모델이 다름 아닌 세키 도시코임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얼마나 마쓰다의 세키 도시코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마쓰다는 세키 도시코의 죽음을 접하고 영혼을 위무하는 마음을 담아 ‘애도의 노래’를 발표했다(1935년 ‘선구(先驅)’ 6월호).
-애도의 노래-
그대가 우리와 함께
고동치는 사회에서 숨 쉰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외쳤네
아아, 그 아주머니(그대)가 출옥했다고!
하지만 기쁨은 우리의 무력감으로
그대에겐 투옥 생활 못지않은 괴로움의 나날
그대에겐 내리쬐는 태양 빛이 필요했네
넉넉한 저택과 투옥 기간에 잃은 피와 살
되찾아야 할 세끼의 식사와 무엇보다도
자유……
그것을 위해 투쟁이 필요했네
그대의 자상함의 근저에 품은 강철 같은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겸허함 속에서 나는 보고 있었네
그대는 필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리
빛나는 투쟁의 역사, 이미 그 역사를 이룬 이들
하지만 독살스레 패잔의 모습에 젖어 있던 기간
그대는 결연히 투쟁을 선언했네
그대에게는 바야흐로 날개가 있었네
투쟁으로 연마한 암컷 매 같은 눈동자
그런 까닭에 대중 속에서 그들과 완전히
일체가 되려고 했네
투옥 기간
조용히 앉아만 있어야 했던 그대는 몇 백번이나
입술을 깨물었을까
그대는 책 속의 투쟁전사가 아니었네
심지어 철망의 감옥 속 시간을 그대는 분노로 채웠네
안일과 영예를 대중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해
무엇보다 노동조합과 대중을 사랑한 그대
파괴된 조직에 오히려 생명의 피를 수혈하고
조금도 뽐내지 않았네
투쟁을 선언했기에 다시 갇힌 지하에서
그대의 대중을 향한 사랑의 행보는
단절됐을까 단절됐을까
더욱이 둘러친 적의 밧줄 때문에
눈을 감고 갇혀 있었던 것일까
프롤레타리아 아트의 모든 것인 그대의
생명을 그럼 우연한 불길이 빼앗았을까
아니다!
그대를 쇠사슬로 묶은 손, 꼼짝 못하게 한 밧줄,
그 셀롤로이드의 장식 가게까지 몰아넣은 대상!
불길이여!
그 순간에 백배가 된 적의 밧줄
그리고 당신의 의지!
생명으로 바꾸기 어려운 것을 지켰네
그대의 죽음 앞에 최후의 눈물까지도
우리가 흘리리 ―1935년
세키 도시코가 ‘쓰다영학숙’(津田英學塾) 재학 중 언니 세키 아키코의 일을 돕기 위해 북해도에서 활동하던 중 경찰에 검거된 것은 1932년. 이치가야(市ケ谷)형무소에서 병을 앓아 보석으로 석방된 건 이듬해 가을. 하지만 그 후 그녀는 법정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채 계속 지하활동에 몰두했다. 경찰의 고문에 시달린 것을 계기로 마르크시즘을 적극적으로 수용, 진보적 활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35년 1월 중순 근무하던 아사쿠사(淺草)에서 화재에 휩싸여 목숨을 잃고 만다. 이를 지켜보던 마쓰다의 참담한 심경이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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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 도시코의 아버지는 알려진 미술평론가였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최초로 자격을 취득한 간호원이었다. 언니는 물론 남편도 철저히 의식 고양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던 만큼 집안 분위기 자체가 진보적이었다. 세키 도시코의 남편이자 동료 활동가인 사토 슈이치(佐藤秀一)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활동 중에 검거돼 투옥생활로 여생을 보냈다.(45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옥사)
<조선인 여성운동가에게 깊게 감명>
눈길은 끄는 것은 세키 도시코의 조선인 운동가에 대한 목격담이다. 도시코는 1929년 치안유지법 위반을 구실로 일본경찰이 4천942명을 투옥시킨 4·16사건에 연루돼 감옥에서 조선인 운동가를 알게 됐다. 도시코는 그 조선인 운동가 김순실(金瞬實)이 양동이에 얼음을 가득 채운 뒤 양다리를 장시간 빼내지 못하게 하는 경찰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한다.(‘신문 아카하타’, 2007년 9월6일 자) 특정한 사례에서 자극을 받으며 사상적 자양분을 흡수하던 마쓰다 도키코와 세키 도시코가 이 내용을 화제로 얘기를 주고받지 않을 리 없었을 터. 조선인 운동가 김순실의 용기와 기개가 세키 도시코에게 영향을 끼쳤고, 마쓰다 도키코 또한 신뢰하던 세키 도시코에게 얘기를 전해 듣고 공감했으리라 유추한다면 비약일까?
그러고 보면 마쓰다는 1926년 조선인 여성 박영생과 만나 두터운 정을 이미 나눈 바 있다. 1931년엔 조선인의 투쟁 모습을 형상화해 ‘행진도’를 집필할 정도였다. 1932년엔 조선인 여성들과 스스럼없이 ‘쌀 내놔라’ 운동에 참여했다. 마쓰다 도키코와 세키 도시코가 조선인 여성운동가에 대한 체험과 인상을 서로 토로하며 진보 운동의 정열과 의지를 다졌으리라 상정해볼 수 있는 일화임에 틀림없다.
마쓰다 도키코는 세키 도시코에게 얻은 그러한 정신적 질료를 창작에 투영시켰다. 권력 통제의 상황임에도 투쟁의지를 불태워 1935년 첫 시집인 ‘참을성 강한 자에게’를 도진샤(同人社)에서 출간한 것이다. 과연 마쓰다는 여류시인으로서 유일하게 발매금지처분 대상이 된 이 시집 ‘참을성 강한 자’가 무난히 출간되리라고 믿었을까.
마쓰다 도키코는 “이 시집이 나왔을 당시 시의 한 자 한 구절까지 세세하게 일본 군국주의정부는 관여했습니다.(중략) 간행된 뒤 바로 판금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건 자신의 사회에 대한 최초의 생각―다시 말하면 초심, 초지(初志)의 시라는 이름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런 만큼 나는 자신의 첫애가 타인의 손에 의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목이 비틀려 죽임을 당한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복각판 시집 ‘참을성 강한 자에게’ 후지출판, 1995년 7월)
시집 출간을 결의한 배경에 교유를 맺던 세키 도시코 및 운동으로 목숨을 빼앗긴 동료들의 자극과 투철한 정신에 대한 흠모가 있었음은 강조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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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깊어가는 밤길을 걸어 돌아오며
너를 생각했다
나와 함께 살아온 과거를 회상했다
어렸을 때
너도 또 괴로울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젖힌 채 몸을 바짝 대고 듣던
너의 심장 고동소리를 생각했다
너는 울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는 황홀하게 너에게 안겨
안녕이라고 태양을 향해 말했다
유치하지만 우주에 대해 버리지 못한 회의감은
사라졌다
네가 존재하는 한 나도 존재하리라고 생각했다 (중략)
―1935년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