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골목길은 엎드려 서연정

2020년 09월 20일(일) 18:27

골목길은 엎드려 순한 목을 늘이고
구부러진 등허리 잠자코 내어준다
여전히 돌담은 낮아 훤히 뵈는 툇마루

빈객이 하마 올까 기다림도 끊겼나
뒤축 닳은 털신 가득 무심코 담긴 신록
새들과 길고양이가 빈 마당을 다툴 뿐

낯선 고향 마을을 천천히 걸어본다
허물린 줄 모르게 경계를 지우는 곳
속사정 묵은 정 품고 골목길은 엎드려

(나래시조, 2018년 여름호, 133쪽)


[시의 눈]

마을을 상징하는 게 무엇일까요. 그래요 골목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만 적적해지고 말았군요. ‘구부러진 등허리’에 ‘뒤축 닳은 털신’을 달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는 목을 늘이며 사람들이 분주히 왕래하던 시절을 끌어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젠 그도 귀찮은지 그냥 ‘엎드려’ 있어요. 그곳에는 시간이 훑고 간 저간의 소리들이 고였습니다. 화자는 그걸 듣지요. 비록 정적에 묻혀있지만요. 그가 속사정 묵힌 정을 비쳐내는 것 같습니다. 엎드려 있다는 건 둥글어진 그 정경들을 끄집어내는 것이겠지요. 그런 화자의 눈길이 온화하고 길어져 보입니다. 세월의 더께나 재해란, 그러니까 최근 장마와 폭풍우처럼 골목을 아예 덮쳐버리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골목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워합니다. 아이들 놀이터이자 어른들이 안부를 묻던 골목길은 다 어디 갔을까요. 민철이와 순희가 만나던 외딴 골목길은 ‘엎드려’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나가지 마라!’ 지금 골목길은 코로나로 더욱 애먼 벌을 받습니다 그려.

서연정 시인은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1997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연말장원과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으로는 ‘먼 길’, ‘푸른 뒷모습’, ‘광주에서 꿈꾸기’ 등이 있습니다. 사물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시조를 쓰는 오롯 광주의 시인입니다.
<노창수·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