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풀벌레 소리 허형만

2020년 09월 27일(일) 17:48

허형만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새벽 산책 중에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녈가녈한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 보내세요
먼 훗날 어느 새벽 별 하나 돋듯
고객님의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갈매빛 만만한 풀벌레 소리
비로소 가슴 적시는 사랑인 줄 알겠지요
(시집 『눈먼 사랑』 시와사람, 2008.)


[시의 눈]

이즈음에 귀뚜라미나 여치, 풀무치들의 소릴 들어 보았나요. 뭐 당신이 듣거나 말거나 풀벌레는 울며 제 생명을 이어가겠지요. 산책길엔 전화기를 끄고 걷습니다. 매양 같은 길이지만 오늘 따라 풀벌레 소리가 더 한창이니까요. 어느새 가을이 깊었어요.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고 다른 소리는 땅에 되돌리라고 하네요. 그대에게 지순한 사랑을 전하려니까 그렇겠지요. 그건 내 사랑의 바람이기도 하지요. 헌데, 정작 그대가 바라는 건 먼 후일에 녹음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아마 지금의 풀벌레소리 같은 사랑을 듣는 것은 아닐까요. 새벽별처럼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그대에게 줄 ‘갈매빛 만만한’ 사랑 또한 가슴을 은은하게 해 줄 거예요. 이제 바람결 시원한 깊은 숲에 도착합니다. 넘치는 풀벌레 소리를 듣습니다. 따라온 고요 또한 절정인 듯도 싶습니다. 적막 속에 서있는 모든 귀를 모아보지요. ‘내 사랑 그대여, 가녈가녈한 이 소리를 들어주세요’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래요. 언젠가 내게 속삭여주던 그대, 그 사랑의 밀어들처럼요.

허형만 시인은 순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목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청명’, ‘풀잎이 하나님께’, ‘새벽’, ‘공초’(供草) 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생각하게 하는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노창수·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