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 답습 그리고 나아가기 강용 |
| 2020년 12월 08일(화)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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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농업 관련기관에 들럿다가 농업에 관련된 오래된 사진이나 책등을 전시해놓은 곳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전시물 중 1970년대 후반쯤의 농림부 각종 사업지침이 정리된 책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열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의 많은 사업과 내용들은 별로 낯설지가 않았다. 요즘의 사업지침에서 시대가 변해가며 달라지거나 추가된 용어들만 조금 빼면, 대부분 지금 사업들의 제목과 방향, 문제점이나 대안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떤 업종이든 세상이 변하더라도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매년 반복적으로 고민해야 할 일들도 많겠지만,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어도 그냥 반복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17년 4월께,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TV토론회 중 농업 부문 토론을 보며, 농부로서 느낀 답답하고 안타까운 점을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모 언론에 칼럼으로 쓴 적이 있었다.
“-지도자의 생각-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동차 하면 어떤 회사가 떠오르십니까? 미국의 농산물 하면 어떤 단어가 연상되십니까? 대량과 GMO, 호주나 뉴질랜드는 청정, 일본은 깔끔함과 방사능, 중국은 저가와 불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 농식품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엊그제 발표한 대선 후보들의 농업공약을 보고 왠지 기운이 빠졌습니다. 모든 후보들의 공약은 농업·농촌은 낙후산업이고 힘드니까 지원하고 도와주겠다는 듯한 느낌일 뿐, 미래 우리 농업은 ‘이것’이라는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며 육성하겠다는 공약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대선 주자들의 인식이든 주변 정책 참모들의 인식이든 만일 농업농촌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면, 집권 기간 내내 농업·농촌은 발전보다는 잘해봐야 유지되는 수준일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기운이 빠졌습니다. WTO나 FTA등 국제 무역에서 농업의 희생을 담보로 성장한 자동차 산업의 종사자가 몇 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동차를 조립하는 최종 공장만을 자동차 산업이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농업인구 약 300만, 그리고 그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식품이나 외식, 유통, 농자재 산업 등 전후방 산업을 포함하면 약 700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농어업을 바탕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식량안보, 환경보존 등 귀에 익은 이유들을 설령 제외한다 할지라도, 국가가 농업·농촌을 발전시키고 육성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1994년 쌀 의무수입을 시작으로 52개국과의 FTA 체결 등 우리 농업·농촌이 적응할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거의 모든 농산물이 수입 개방되었습니다. 그것을 앞으로 당선될 대통령님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농업하면 연상되는 ‘이것’ 이라는 비젼을 제시하고 육성하겠다는 공약이 없다면 그것은 5년 뒤 그분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11월11일 ‘농업인의 날’ 대통령님의 기념사에서 농업농촌이 매우 발전되고 안정된 듯한,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는 비전을 제시한 듯한 말씀을, 내가 만난 많은 농업인들은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써 주었을 기념사의 내용 중에 대통령님의 판단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8.5% 증가한 내년도 슈퍼예산 중 전체예산 대비 농업예산은 사상 처음으로 오히려 3% 이하로 떨어졌다.
그 이유가 지도자의 무관심 때문이든 누군가의 비겁함 때문이든 그것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매일 언론을 도배하는 엄청난 이슈들 때문에 농업은 잘 보이지 않겠지만, 전에도, 그전에도, 매 정권마다 행사 때만 잠시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그저 과거를 반복하는 것보다, 현실의 문제점을 과감히 인정하고 대안과 노력의 의지를 더 깊이 보여주는 지도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면 사람이 바뀌어도 산업은 나아가는 농업·농촌이 될 것이다.
지난 1년간 이곳에 쓴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느낀 문제와 대안을 나름대로 썼지만 지금 보니 나 또한 혜안이 부족하여 모자란 점이 많아 부끄럽기도 하다. 더 나은 새해를 기대하며 올해를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