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신세 차마 세모의 근심은 참기 어렵구나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07) |
2021년 03월 09일(화) 18:47 |
|
근제 안축
촛불이 꺼져 가는 낡은 여관 고요하고
나그네 신세여라 세모 근심 어려움에
내 나이 쉰이 되는데 산가지만 세보네.
燈殘古館轉幽幽 客路難堪歲暮愁
등잔고관전유유 객로난감세모수
夢罷明朝年五十 夜深高臥數更籌
몽파명조년오십 야심고와삭갱주
섣달그믐이 돌아오면 여러 가지 뒤범벅이 된 생각을 하면서 지난해를 은근하게 되돌아본다. 걸어왔던 발자취가 험로였거나 수많은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보람도 없이 한 해를 보냈다는 아쉬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와 같은 반성은 다음 해엔 더욱 잘해야겠다는 어떤 다짐으로 이어져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내일 아침 꿈을 깨면 내 나이 쉰이 되는데 밤 깊도록 높이 누워 산가지만 자주 세어 본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나그네 신세 차마 세모의 근심은 참기 어렵구나(除夜)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근제(謹齋) 안축(安軸·1282-1348)으로 고려 말의 문신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지밀직사사와 첨의찬성사를 차례로 지내고, 1345년(충목왕 1) 검교 평리로 찬성사에 임명됐던 인물이다. 감춘추관사가 돼 민지란 사람이 수찬했던 ‘편년강목’을 이제현 등과 중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촛불이 점점 꺼져 가는 낡은 여관은 고요하기만 하고 / 나그네 신세는 차마 세모의 근심은 참기 어렵구나. // 내일 아침 꿈을 깨면 내 나이 쉰이 되는데 / 밤 깊도록 높이 누워 산가지만 자주 세어 본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섣달 그믐날 밤]으로 번역된다. 한 해가 가고 다시 한 해를 맞이하는 그 밤을 우리는 흔히 섣달 그믐날 밤이라고 했다. 이날이 되면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를 되돌아보고, 여닫듯이 살며시 새해를 생각해 보는 하룻저녁을 갖는 시간이다. 금년에는 명년에는 하면서 속고만 사는 것이 인간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섣달 그믐날 밤 인적이 끈긴 정적이 감도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한 줌 시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촛불까지 가물가물 꺼져 가는 낡은 여관은 고요하기만 한데, 나그네 신세가 돼 세모의 근심은 차마 참기는 어렵다고 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섣달 그믐날을 맞이하는 마음을 착잡하기 그지없었을 것은 뻔해 보인다.
화자는 시적인 전환을 가져와 오늘 밤의 섣달 그믐밤에 이어서 내일 아침을 생각하게 되는 후정을 그려내고 있다. 내일 아침 꿈 깨면 내 나이가 이제 쉰이 되는데, 밤이 깊도록 높이 누워서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산가지만 자주 세어 본다고 했다. 주산과 같이 생겼던 산가지는 숫자를 센다는 뜻이 된다. 나이가 먹어 가면서 지나온 날보다는 다가올 미래라는 인간의 허탈을 생각했겠다.
※한자와 어구
燈殘: 등잔불이 꺼져가다. 古館: 여관. 혹은 관사. 轉幽幽: 고요하기 그지없다. 客路: 나그네의 신세. 難堪: 참기 어렵다. 歲暮愁: 세모의 근심. // 夢罷: 꿈을 파하다. 꿈을 깨다. 明朝: 내일 아침. 年五十: 나이가 오십이다. 쉰 살. 夜深: 밤이 깊다. 高臥: 높이 눕다. 數更: 문득 세다. 籌: 산가지.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