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 엽서 한 장에 / 수필 이재월 |
| 2021년 03월 29일(월)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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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동갑내기 친척이 자기 친구라며 교복을 입고 같이 찍은 흑백사진 속에서 남학생을 소개해 줘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작달막한 키에 야윈 모습인 그 남학생은 시골 산중이 고향이라 했다.
졸업 후 몇 달이 지나 해군에 가게 되었다고 편지가 왔다. 그 후 해군복을 입은 사진을 편지 속에 보내왔다.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야 했다. 같이 보낸 시간이 없으니 쓸 말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힘든 군대 생활을 이야기했지만 공감도 가지 않았다. 나 역시 고달픈 군 생활에 위로도 정보제공도 없는 답답한 글이었겠지. 산골학교에서 변화 없이 살아가며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겨우 편지만 주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빨간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기도 했고, 우체부 가방에 내 편지가 없으면 심심하기도 했다. 편지는 점점 소원해져 두 번 받으면 한 번 답해 주는 정도이다가 내 응답이 점점 느려지니 펜팔은 끝이 났다.
그동안 받았던 편지를 꺼내 보니 글씨체를 다양하게 써서 보냈다. 종으로 횡으로 정갈하게 쓰기도 하고 초서체로 갈겨쓰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도 글씨체를 본떠 써보며 보냈던 기억이 난다. 펜팔 덕분에 받은 여러 글씨체의 흉내를 내보며 여자 친구들에게 보낸 엽서가 몇 장 보인다.
몇 년 전 오월 어느 날 아름다운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잘 아는 분이 지중해의 이드라 섬에서 여행 중 보낸 것이었다. 나도 지중해 물결 따라 크루즈 여행을 갔을 때 가본 곳이다.
아름다운 그 섬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 섬을 향해 우리가 탄 배가 달릴 때 멀리서 바라보니 푸른 물결 위에 수석을 얹어 놓은 것같이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섬이었다. 언덕배기에 주홍색 지붕과 하얀 벽이 산뜻하게 잘 어울렸던 집들이 지금도 그려진다. 조그마한 만에 들어서니 바닷속 하얀 모래 위에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고기가 많이 보였다.
만을 삥 둘러 바닷가 길가엔 기념품 가게가 있고 새까만 선그라스를 쓰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화가들. 그 앞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여행객들이 모델로 여기저기 앉아있다.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예술가의 섬”이라고 한다. 어느 가게에 들러 파란 비취로 장식한 은귀걸이를 한 쌍 샀다.
차가 없어 공해가 없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보도진이 없는 섬이란다. 영국 다이에너 왕비가 마지막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고 나가는 길에 사람들 눈에 띄었다고 한다. 세기적인 여인 다이에너 비가 걸었다는 길이다. 애석한 마음 앞세우고 한 발자국씩 옮겨가며 섬을 빠져나와 배에 올랐을 상상을 해 보았다.
아름다운 엽서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들여다보다 거기 씌어있는 시를 읽어 보았다. 애원하는 듯 “사랑의 빗장”을 열어달라는 표현이다. “힝 이게 뭐야. 점잖지 못하게. 웃기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나에게 이런 감정이 있단 말이야. 남자들은 알고도 모를 일이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치를 슬슬 봐가며 가까이 있기 싫어 거리를 두고 앉았다. 평소 격의 없이 지낸 처지에 이런 글을 보내다니 괘씸해 책꽂이 위에 던져 놨다. 그 후에 만났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고 나 역시 아무 일 없는 듯 무표정했으나 마음 한구석엔 엽서의 글이 떠오른다.
‘이상한 반응이 온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어쩌다 책꽂이 위의 엽서가 눈에 띄면 또 벼르게 된다. 시간이 얼마간 가고 내 마음이 느긋해진다. “용서해 주자. 그래야 인간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살면서 호감이 가는 사람도 만나고 상대편에서 친절을 베풀 때 관심이 쏠리는 경우도 있다.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일까?
어느 날 그가 두드린 “문”이 너와 나의 수평적인 애정의 문이 아니라 수직적인 주님의 사랑을 말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무안했다. 나 봐라 나 봐.
‘착각은 자유라지만 어쩔까 잉?’
- 이재월 약력 -
▲한국수필 신인상, 문학예술 신인상 수상(시부문)
▲월간문학 전 회원, 광주문협 이사
▲광주시인협회 이사, 광주여류수필 회장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광주문학상 외
▲수필집 ‘이 나이에 부러운 건’ 외 3편
▲시집 ‘세월강에 머문 그날들’ 외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