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섬진강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1코스

봄꽃따라 걸으며 소설 ‘토지’를 가슴으로 읽다

2021년 04월 13일(화) 19:42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도로도 구불구불 이어진다. 하얀 띠를 이룬 벚꽃길은 강물이 흘러가듯 유연하다. 마을 근처 보리밭을 지날 때는 푸른 보리밭과 순백의 벚꽃이 어울리고, 산비탈 강변길에서는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호흡을 맞춘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도로는 벚꽃이 하늘을 덮어 벚꽃터널이 됐다. 자동차들도 아름다운 벚꽃길에 흠뻑 빠져 속도를 늦춘다. 유홍준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이 세상에 둘이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라 했다. 섬진강변길의 아름다움은 벚꽃 피는 봄철에 최고조에 달한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갑자기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평사리 최참판댁주차장에서 최참판댁을 향해 경사진 마을길을 따라 걷는다. 마을 뒤에는 지리산 형제봉이 우뚝 서 있다. 저 산줄기는 지리산 남부능선으로 불리는데, 남부능선은 지리산 주능선 영신봉에서 갈라져 삼신봉을 솟구치고 형제봉-신선대-고소산성을 거쳐 섬진강으로 빠져든다.
지리산 자락 군데군데에 자리잡은 마을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사진은 토지세트장.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토지’는 만석꾼 최참판댁이 몰락하면서 홀로 남은 딸 서희가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3대에 걸친 이야기다. 소설은 구한말인 1897년부터 1945년 해방시기까지 48년에 걸쳐 이곳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진주·통영과 서울, 중국·일본을 이동하면서 전개된다. 서희와 길상을 비롯하여 700명에 이르는 인물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개인사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변천사까지 담고 있다.
소설 속 공간을 재현한 최참판댁은 평사리 상평마을 언덕배기에서 평사리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소설 속 공간을 재현한 최참판댁은 평사리 상평마을 언덕배기에서 평사리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돌담이 멋스런 고샅을 사이에 두고 드라마 ‘토지’ 세트장과 마을 주민들의 집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다. 최참판댁은 2001년 준공되어 2006년 SBS 대하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으로 활용됐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예능 세트장으로 활용됐다. 최참판댁을 비롯한 세트장에는 푸릇푸릇 새 풀이 돋아나오고 벚꽃, 복사꽃, 배꽃, 개나리, 유채꽃 같은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최참판댁에서 마을 골목길로 내려와 ‘박경리 토지길’을 따라 걷는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 형제봉 자락 밭길을 걷는다. 밭에는 유실수들이 꽃을 피우거나 막 싹을 틔우려하고 있다. 토지길은 한동안 지리산 둘레길과 겹친다. 8년 전 지리산 둘레길을 종주하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가을철 추수하기 직전이라 평사리들판은 황금색으로 출렁거렸고, 감나무에는 대봉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푸릇푸릇한 들판과 배꽃, 복사꽃들이 화사한 봄빛을 선물해준다.

길은 악양면소재지를 아래에 두고 입석마을, 정서마을을 지나 산자락 농로를 따라 상신마을로 향한다. 길가에는 백발의 노인을 연상케 하는 할미꽃이 허리를 굽은 채 피어있고, 조팝꽃도 화사하게 피었다. 핑크빛으로 요염하게 핀 복사꽃은 벚꽃이나 배꽃 같은 흰 꽃 속에서 사람을 유혹한다.

악양은 삼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ㄷ’자를 이룬 지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너른 들판과 30여 개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넓은 들판 앞쪽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섬진강 건너에 백운산이 우뚝 서 있어 악양은 풍요로우면서도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상신마을에 도착하니 오래된 고가 한 채가 기다리고 있다. 조부잣집이라 불리는 조씨고가다.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 바로 조부잣집다. 조씨고가는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직계 후손인 조재희가 낙향해 16년에 걸쳐 지은 집이다. 동학농민전쟁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랑채와 행랑채, 후원의 초당·사당이 모두 불타고 현재는 안채만 남았다.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소실돼 예전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지만 고풍스러움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씨고가는 안채만 남았지만 집의 경계를 알리는 기와를 얹은 흙돌담은 고풍스러울뿐더러 지금도 여전히 부잣집 위세를 자랑한다.

조부잣집 담장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지만 상서마을 골목길은 돌로만 쌓은 돌담장이다. 소박한 농촌주택과 돌담길이 정감을 더해준다. 돌담장 밑에 고급스럽게 핀 금낭화가 상서마을의 봄을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천천히 돌담길을 걷고 있으니 어린 시절 돌담장 뒤에 숨어 숨바꼭질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정동마을 앞에서 악양천 제방길로 들어선다. 악양면소재지 악양천변에는 ‘푸른 물빛이 깃든 산골 물 옆에 있는 숲’ 이라는 예쁜 이름의 취간림(翠澗林)이 조성되어 있다. 취간림에 들어서니 아름드리 활엽수 고목에 연두색 새잎이 막 피어나고 있다.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취간림은 고려시대 수구막이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 숲이다. 수구막이는 마을에 나쁜 기운이 못 들어오게 막거나, 마을의 좋은 기운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돌이나 숲을 말한다. 취간림은 2000년 한국의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 숲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취간림을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넓은 평사리 들길을 걷는다. 평사리들판은 무딤이들이라고 불린다. 무딤이들은 밀물 때 섬진강물이 역류하고 홍수가 나면 무시로 물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우리말 이름이다. 평사리들판은 여의도보다 조금 작은 83만평으로 예전엔 드넓은 모래톱과 척박한 논밭에 불과했었다. 일제강점기 때 둑을 쌓으면서 만석지기 부자 두엇은 나올 만한 문전옥답으로 바뀌었다.

들판 가운데에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서 사이좋은 금슬을 자랑한다. 나무이름도 ‘부부송’이다. 부부송은 넓은 들판 가운데에서 바람막이도 없이 두 그루만 외따로 서서 눈보라와 비바람을 함께 견디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독립적이지만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바람 속 부부송이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부부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들판 가운데에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서 사이좋은 금슬을 자랑한다. 나무이름도 ‘부부송’이다.

부부송 앞을 지나니 동정호라 불리는 호수가 기다리고 있다. 호숫가에는 2층 누각 악양루(岳陽樓)가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악양루에 오르니 동정호가 잔잔하고, 평사리들판과 평사리마을, 섬진강변 벚꽃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비 내리는 악양루에 앉아 박경리 소설 ‘토지’를 마지막 부분을 생각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별당에서 서희와 양녀 양현이 부둥켜안은 채 기뻐하고, 읍내에 나갔다가 나룻터에서 내린 최참판댁 일꾼 장연학이 만세를 부르며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여행쪽지
‘섬진강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1코스’는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과 최참판의 실제 모델인 조부잣집 등을 거쳐 평사리들판을 걷는 길이다.
▲코스 : 최참판댁주차장→최참판댁→입석마을→정서마을→상신마을(조부잣집)→취간림→악양천→부부송→동정호(악양루)
▲거리, 소요시간 : 13km, 4시간 소요
※난이도 : 쉬움
이 기사는 광주매일신문 홈페이지(kjdaily.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kjdaily.com/1618310537543076134
프린트 시간 : 2024년 02월 22일 20: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