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11) 길 가던 행인만 비를 피하려고 처마 밑에 드는구나 |
| 2021년 04월 20일(화)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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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이곡
거창할 때 느티나무 그늘을 드리웠고
높은 문은 분명히 자손 위해 만드는데
근년에 출입 끊긴 채 행인만 드는구나.
甲第當時蔭綠槐 高門應爲子孫開
갑제당시음록괴 고문응위자손개
年來易主無車馬 惟有行人避雨來
년래역주무거마 유유행인피우래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몰려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시는 이런 속담을 살며시 떠올리게 한다. 정승이나 관찰사 등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막상 당사자가 죽고 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발길이 끊기는 상황을 보여 주는 작품의 면면이 보인다. 거창한 저택 한창 때는 푸른 느티나무 그늘을 드리웠고, 높은 문은 분명 자손을 위해 만들었으리라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길 가던 행인만 비를 피하려고 처마 밑에 드는구나(易主無車馬)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으로 고려 말 학자이자 문신이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했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두루 주유했었다 한다. 1350년(충정왕 2) 원으로부터 봉의대부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을 제수 받았지만 그 이듬해 유명을 달리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거창한 저택 한창땐 푸른 느티나무 그늘 드리웠고 / 높은 문은 분명 자손을 위해 만들었으리 // 근년에 주인 바뀌니 수레 출입 끊긴 채 / 길 가던 행인만 비를 피하려고 처마 밑에 드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주인이 바뀌니 수레 출입 끊기고]로 번역된다. 위 시문은 실제(失題)돼 시제를 따로 붙였다. 이 시를 두고 몽헌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굳이 가옥을 사치하게 크게 지어 후세를 위한 방도를 마련한 자는 이 시로써 경계를 삼을 수 있다고 했다. 집을 사람이 살만큼만 지어야지 너무 번지르르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 교훈이겠다.
시인은 이와 같은 점을 크게 염두하면서 거창한 저택의 허구성을 꼬집어 한 줌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거창한 저택은 한창 때는 푸른 느티나무 그늘을 드리웠고, 높은 문은 분명 자손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거창한 저택이란 역사적인 허구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화자는 후정을 담기는 커녕 경치 구를 덧칠해 가면서 대궐 같은 집의 허구성을 시주머니가 넘칠 만큼 담아내고 있다. 근년에 주인이 바뀌니 수레 출입 끊긴 채, 길 가던 행인만 비를 피하려 처마 밑에 든다고 했다. 모두가 선경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생경해 보이지 않아 후정(後情)을 담았을 만큼 새로움을 주고 있다. 시적인 감칠맛을 준다.
※한자와 어구
甲第: 갑관(甲觀: 일류 저택, 훌륭한 저택)이라 함. 當時: 그 당시엔. 蔭綠槐: 푸른 나무 그늘을 드리우다. 高門: 높은 문. 應爲: 응당 ～를 위해서 만들다. 子孫開: 자손의 번창을 위해서. // 年來: 해가 오다. 易主: 주인이 바뀌다. 無車馬: 거마가 없다. 惟有行人: 오직 행인만이 있다. 避雨來: 비를 피해 오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