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교수의 일본 작가 비평](23)한국에서 바라본 마쓰다 도키코

시대적 상황이 인간 내면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다

2021년 04월 22일(목) 18:55
황실이 위치한 지요다(千代田)성의 소나무
-고토쿠 슈스이 서재에서 천황 암살 연습-
지난 21회 차에서 천황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11년 사형당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와 그의 일행에게 안중근 의사가 영향을 끼친 점에 대해 언급했다. 마쓰다 도키코 부부의 연을 맺어준 후루카와 미키마츠(古河三樹松)의 친형 후루카와 리키사쿠(古河力作)도 관여한 사건이니 그 내막을 좀 더 들여다보자.

일찍이 대역사건의 진상규명에 매진해 업적을 남긴 일본의 평론가 간자키 교시는 메이지천황 암살계획 핵심 인물인 미야시타 다키지(宮下太吉)가 아카시나(明科)의 오아시산(大足山)에서 밀조한 폭열탄의 시험에 성공한 것은 1909년 11월3일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혁명전설 대역사건 3).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0월26일로부터 8일 후의 일이다(가메다 히로시).

고토쿠 슈스이가 아이진샤의 가와다 구라키치에게 써준 단가(간자키 교시 _혁명전설 대역사건 3_에서)
미야시타는 그 성공의 기쁨을 알리기 위해 도쿄 센다가야의 고토쿠 슈스이와 평민사 동지들에게 비밀통신을 보낸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상경해 상세히 보고하겠다는 편지도 덧붙인다(같은 책).

그 후 미야시타가 직접 상경해 평민사를 방문한 것은 연말연시. 미야시타는 1910년 1월 1일의 일기에 평민사에서 1박을 하며 고토쿠와 그의 내연의 처 간노 스가코(菅野須賀子), 고토쿠의 비서(서생) 니무라 다다오(新村忠雄) 등과 술잔을 나누며 유쾌하게 담화를 나눴다고 기록했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은 이때 미야시타가 폭열탄의 케이스와 화약을 넣은 검은 가방을 들고 왔다는 사실이다(조서). 천황 암살계획을 재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야시타는 고토쿠의 서재에서 가방을 열고 폭열탄의 작은 양철 케이스 2개와 종이에 싼 흰 분말(과염소산칼륨)을 꺼낸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야시타는 물론, 고토쿠, 간노, 니무라 네 사람이 돌아가며 폭열탄의 빈 케이스(직경 약 3㎝, 길이 6㎝)를 쥐고 다다미 위로 내던지는 연습을 한다(같은 책). 간자키는 네 사람이 연습 후 폭열탄의 형태에 대해 감상을 토로하지만, 암살계획을 실행하자고 발언하는 이는 없었고 평민사 내부의 동요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허나 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연습하며 이심전심의 교감을 나눈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요한 사건이 또 있다. 연초를 맞이해 센다가야의 평민사로 찾아온 아이진샤(愛人社)의 가와다 구라키치(川田倉吉)는 사내에서 열릴 신년회를 위해 고토쿠에게 뭔가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의뢰를 받은 고토쿠는 천황 시해를 암시하는 단가를 주홍색 당지(唐紙)에 붓으로 써서 건넸다.(같은 책)

폭탄이 날으는 모습을 본 (새해) 첫 꿈은
지요다(千代田)의 소나무에 쌓인 눈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

고토쿠는 1월5일 동료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郞)와 신슈(信州)의 아카하네 간케츠(赤羽巖穴)에게도 이 자극적인 단가를 연하장에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고토쿠의 뇌리에는 메이지천황이 거주하는 지요다성의 설경이 깊게 새겨져 있었던 셈. ‘가지 부러지는 소리’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간자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폭열탄 재료를 검은 가방에 넣어서 신슈에서 상경한 미야시타 다키치가 천황 암살계획에 대해 상담하려 했을 때 자신을 억제하며 위험한 구체적 (상황)을 피했던 슈스이였다. 그 냉정한 슈스이에게 이 폭발적인 풍자적 노래가 있음은 다다미 위로 내던지는 폭열탄의 빈 깡통을 쥔 손바닥의 감촉과 흥분이 불러온 결과일까?(혁명전설 대역사건3)


-고토쿠의 단가, 암살 모의 분위기에 자극-
고토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안중근의 기개와 거사를 상찬한 한시와 더불어 빠뜨릴 수 없는 단가다. 대역사건을 얘기할 때 미야시타 다키치가 핵심 인물이고 고토쿠는 천황 암살계획 실행 단계에서는 배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자료와 법정 증언 등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논의 끝일까? 고토쿠 내면의 정서에 대한 고찰은 빠져 있다.

고토쿠의 단가가 모의 분위기를 더욱 자극했음 직하다. 실제로 천황 암살을 위한 폭열탄 투척 배치도가 등장한 것은 1월 23일. 사전에 협의 후 후루카와 리키사쿠가 고토쿠의 자택(평민사)을 찾아온 때다. 고토쿠는 뱃속이 좋지 않아 옆방에서 누워 있었고 고토쿠 자택에서 니무라 다다오가 자신의 노트에 연필로 도면을 그리며 설명한다.

제5회의 조서에 따르면 니무라는 각자가 위치를 정하고 있다가 서로 사인을 주고받은 뒤 먼저 갑(甲)이 폭열탄을 천황의 마차에 던지고, 이어서 을(乙)도 던진다. 계속 마차가 움직이면 병(丙)과 후방에 있는 정(丁)도 순서대로 폭열탄을 투척한다는 집단적 공격 방법을 제시했다.

리키사쿠는 자신의 옥중 수기에 니무라가 주도한 것을 세 사람이 모의한 것으로 재판장이 몰아간 점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게다가 현장에서 최초로 투척하는 갑의 위치를 두고 의견이 맞지 않아 투척 순서가 결정되지는 않았고, 급습 장소의 현장 조사를 담당하기로 한 리키사쿠가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도면을 마련하고 모의하기 위해 회합한 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고토쿠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는 엿듣고 있었으리라.

고토쿠의 단가가 촉매제가 된 셈이다. 고토쿠는 미야시타 주도의 폭열탄 투척 연습을 계기로 단가를 통해 동료들과 천황 시해에 대해 교감을 나눴다. 그의 단가가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폭열탄 투척 모의에 앞선 신년 초 예고문이 된 것이다. 내무성 경보국에 근무하던 구보 사부로(久保三郞, 나중에 지바시의 시장)도 단가가 불온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떻게 천황 절대주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일이 가능했을까? 고토쿠의 사상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일본을 두둔하기도 했던 기자(만조보) 시절이나 평민사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평민사 활동을 하면서는 황실 부정의 시점을 견지한다. 1906년 이후엔 행동론에 방점을 찍고 아나키즘 운동을 펼쳤다.

허나 1910년 미야시타의 평민사 방문 후 주변의 회유와 당국의 감시 등으로 고토쿠는 결의를 굳히지 못했던 것 또한 팩트다. 최종적으로 메이지천황 암살계획 모의자는 미야시타 다키치, 간노 스가코, 니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인 것으로 판명됐다.

1910년 3월 고토쿠가 유가라온천에 머무르게 되자 니무라는 평민사에서 물러나기 직전 천황 암살계획이 그들의 사상에 이익일지 불이익일지를 고토쿠에게 묻고 매듭을 지르려 했다. 그 시점에서 고토쿠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 해 전(1909년) 천황 암살 얘기가 나온 뒤 폭열탄 제조에 개입할 때는 달랐다. 고토쿠는 오랜 친구인 오쿠노미야 겐시(奧宮健之)를 평민사 자택으로 부른 적이 있다(간노 스가코의 일기). 오쿠노미야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고토쿠에게 폭열탄의 구조를 가르쳐 줬다고 해서 대역사건의 피고의 한사람이 돼 처형당했던 인물.
고토쿠 슈스이 일행이 활동하던 평민사(1907년)

고토쿠는 오쿠노미야에게 폭열탄의 구조를 배운 사실을 고백했다(예심조서). 고토쿠가 폭열탄 제조법에 대해서 오쿠노미야에게 들은 뒤 서생 니무라를 통해서 미야시타에게 가르쳤던 것이다(츠지노 이사오, 동지사법학 48권, 1996).

따라서 고토쿠가 배제된 뒤의 결과만이 대역사건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을 터. 고토쿠는 천황 암살에 대해서 항상 의식은 하고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서거 후 고토쿠가 그의 의거를 기린 한시와 안 의사의 사진이 새겨진 엽서를 품고 다닌 그의 정신이 곧장 어떤 행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가처럼 다분히 의식적인 필터링을 거친 것 아니었을까.

천황 암살계획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일에서는 물러섰지만, 고토쿠는 안 의사의 거사를 기린 한시와 단가를 되뇌면서 절친한 동료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안 의사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터라 그 행위를 동경하고 있었으며, 내면 깊숙이 잠재한 혁명의 꿈도 버리지 않고 있었으리라.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
마쓰다에게 반려자를 소개한 후루카와 미키마츠의 형 리키사쿠는 이러한 고토쿠의 사상에 공감해 평민사의 일원이 됐다. 천황 암살모의에 후루카와 리키사쿠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그도 대역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이 됐다. 고토쿠와 모의자 4명을 포함해 12명이 사형을 당했다.

마쓰다 도키코 장녀 하시바 후미코는 어머니가 대역사건 사형수의 동생 후루카와 미키마츠의 권유로 실업자 운동을 하던 오누마 와타루와 결혼했는데, 아버지 와타루는 아나키스트로서 구로하타(黑旗)사의 간판이 걸려 있는 2층에서 숙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어머니 마쓰다 도키코가 그린 궤적’, 해풍, 2007).

시대적 암운이 드리운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마쓰다의 가족을 얘기할 때 화제가 되는 내용이다.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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