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고수가 가는 길

정진탄
정치부장

2021년 05월 30일(일) 19:28

공무원 5급 공채(행정고시) 1차 시험을 일명 피샛(PSAT·공직 적격성 평가)이라고 하는데, 난해한 문제가 수두룩하다. 언젠가 문제 하나를 풀어보려다 일순 머리에 경련이 일기 시작해 냅다 문제지를 던져버렸다. 뭐 이런 게 있나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어려웠다. 피샛은 헌법을 비롯해 언어논리, 자료해석, 상황판단 과목으로 구성돼 있다. 거의 모든 문제가 손을 못 댈 만큼 난도가 높다. 어이쿠, 이런 것들을 공부하는 공시족들이 짠했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행시 2차 시험은 하루 한 과목씩 수일간에 걸쳐 시험을 봐야 하니 시험을 치다 나가떨어지겠더라.

수험생들이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는 행시를 통과해 합격증 거머쥘 때의 순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순간을 만끽한 분들이 지금 광주와 전남 행정기관 곳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시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각종 시책 개발과 굵직한 도시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랬다고 하지 않은가. 서울행 SRT 고속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경기도 동탄이란 곳을 거쳐 가게 돼 있는데, 한 청년이 자기 아버지가 이곳 택지개발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고 하자 이 말을 듣던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는 택지개발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한 고위공무원이라고 응수했다고. 누가 더 자부심을 느껴야 할까. 요즘은 하도 지(地)테크가 신분과 인생을 결정 짓는다고 하니 판단이 쉽지 않다.

하여간 공직자들의 헌신은 두드러진다. 특히 코로나19 시기에는 그분들의 노력과 봉사가 없었다면 이미 삶의 질서가 망가져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공무원 하면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시민들로부터 좋은 대우와 부러움을 받는 직업군이 됐다. 취업난 시대에 공무원이란 신분은 노골적인 선망의 대상이다. 늘공(늘 공무원), 어공(어쩌다 공무원)이란 말이 떠돈 지 오래다. 공직으로 이직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많다.

국가 전체적으로 공무원 규모가 비대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고난이 이어지는 특정 시기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국가와 정부 조직이 일정 부분 취준생들 떠안아 줘야 한다.

공무원, 특히 행시를 패스한 고위직 경우 막중한 업무를 떠맡고, 국장과 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퇴임하는 게 상례다. 공직을 떠나면 개인 사업을 할 수 있고 학계로 진출하거나 연구 업무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삶의 영위하는 부류가 있는 한편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케이스도 심심찮게 있다.

근데 주지하다시피 이 지점에서 자주 탈이 난다. 정치의 문턱으로 넘어가다 삶이 전복되는 것이다. 그간 잘 쌓아온 공직, 행정의 커리어가 먹칠된다. 이런 케이스의 지역 행정기관 출신 인사들이 종종 나온다. 이 지점에서 누구나 잘 아는 행정의 달인 고건 전 총리가 대권 길목에서 좌절한 것은 행정인들의 정계 진출사 고전이다.

정치는 더러우니까 묵묵히 자기 맡은 일에 전념해온 행정인이 버텨내지 못한다는 게 여러 원인 분석 중 하나다. 이 같은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 요즘 행정기관 고위 간부들을 만날 때 내년 지방선거도 있고 해서 퇴임 이후 인생설계를 물으면 정치 입문은 적극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한 번쯤 단체장, 국회의원 등의 출마를 고려해보지만 어디까지나 고려지, 그 이상은 아니다. 선거 비용은 차치하고 한국 정치의 ‘시궁창’을 과연 견뎌낼 수 있느냐가 결정적이다. 그냥 관료의 삶으로 끝내는 게 속 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비극이다. 수십 년간 닦고 쌓아온 행정의 경험을 허비하는 것은 지역적,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행정도 시민과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다를 수 없는데, 완전히 딴판의 영역으로 나뉜다. 한국 정치의 수준 낮은 밑바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국 정치야말로 에고(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기심)의 극단적인 발로 형태다. 권력을 거머쥐어 국민 안녕을 책임지겠다는 야망의 표출 심연에는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러니 국민은 매우 고단해진다. 얼마 전 정치권에서 수차례 천문학적인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퍼붓겠다고 하자 일부 영혼 있는 정부 공직자들이 후대 세대의 엄청난 짐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이내 허물어진 상황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행정의 고수들이 정치 괴물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정치·사회구조는 구시대적인 유물로 적폐 대상이다.

정계 진출을 꿈꾸는 일부 행정의 달인에게 바란다. 정말 국민 시름을 달래고 행복을 책임져 줄 게 아니라면, 그러잖아도 선거 비용이며 마타도어가 심할진대 정계 진출을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행정 인생 말년에 정치의 늪에 발을 잘못 디뎌 헤어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하지 말길 촉구한다. 차라리 ‘행정 재능기부’를 하는 방안을 찾아보길. 소소하지만 자치구 봉사활동을 비롯해 지역공동체 발전을 위한 모임 등에 참가하며 주민들과 소통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니면 그간 각종 시책을 펼치면서 겪은 애환을 담아 후배 공직자를 위한 매뉴얼 형태의 책을 펴내는 작업도 권장할만하다. 행정의 고수들이 꼭 정계에 뛰어들어 ‘큰 것’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강호에서 얼마든지 유유자적할 수 있는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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