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를 추모하며 / 이정록
2021년 07월 27일(화) 19:39
이정록 전남대 교수·前 대한지리학회장
“누군가 눈밭에 첫발을 내딛고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 발자국을 따른다면 마침내 길이 열리게 된다. 만일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구불구불 어지러이 걷는다면 그 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앞서가는 사람이 보행(步行)을 삼가야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광순(朴光淳) 교수님의 자전 에세이 ‘나의 태평정기’ 서문에 실린 글이다. 매사에 반듯하셨던 고인 품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수님 부음에 필자는 놀랐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꼼꼼하셨던 교수님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정년퇴임 후 스승의 날이면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과 함께 간혹 뵐 때나 서울행 기차에서 마주칠 때 교수님은 항상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발인 전날 양복완 전 경기도 제2부지사와 함께 조문을 갔고, 빈소에서 가족으로부터 교수님 부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교수님 출생지는 영산강 인근 영암군 서호면 태백리다. 1933년 계유(癸酉)년 음력 5월 초하룻날 초저녁에 자작농의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수님 모친은 ‘닭이 하루 종일 먹이를 먹고 저녁이 돼 편하게 쉬는 시간이 태어났으니 평생 큰 고생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고 늘 말씀하였다고 한다. 자작농 아들이었지만 배고팠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니 소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좋은 사주 때문인지 교수님 일생은 참으로 순탄했다.

교수님은 1947년 장천초교를 나와 목포상업학교와 목포초급상과대학(2년 과정)을 거쳐 1957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대학원에서 석사(경제학)를 받고, 1975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남대 경제학박사 제1호였다. 1964년부터 모교 전임강사가 되어 200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6년간 후학을 가르쳤다. 퇴임 직전 지방대 출신 박사이자 교수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에게만 부여하는 영광을 교수님은 누리게 된 것이다.

교수님은 교수 재직 중 많은 보직(補職)을 맡았다. 전남대학보사 편집국장(70-73)을 시작으로 학생처장, 경영대학원장, 대학원장 등이 그것이다. 목포대 초대 학장(79-80)으로 지금의 목포대 기틀을 다졌다. 일본 도쿄대, 동북학원대, 도호쿠가쿠인대 등의 객원교수와 구루메대 교수로 활동하며 전남대와 일본 대학들 간 가교 역할도 했다. 애향심이 유달리 남달랐던 교수님은 퇴임 후 왕인(王人)박사현창협회 사업과 왕인문화연구소장을 맡아 고향을 위해 봉사했다.

교수님의 학문적 연구 관심은 크게 세 분야였다. 첫 번째 분야는 인류의 경제활동과 발전과정이다. 도서와 어촌의 사회경제학적 구조와 변천에 관한 것으로 어업경제사다. 두 번째 분야는 인류의 경제생활에 대한 비교경제체제 연구다. 주로 어촌경제의 한일 비교연구다. 세 번째 분야는 지역발전론이다. 특히 광주전남 지역개발, 농어촌 경제발전 등이다. 이 분야 연구는 교수님과 필자의 학문적 연결고리였다.

무엇보다 교수님은 한국 어업경제사 연구의 독보(獨步)적 존재였다. 교수님이 어촌에 관심을 갖게 된 연원(淵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친구들과 떠난 흑산도 주유(周遊)다. 이 여정에서 교수님은 어촌경제 낙후성과 어민공동체 해체를 목격한다. 이후 전남 서남해안 어촌들 집중 답사하면서 어촌의 현주소와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현지조사 결과를 전남대 지역개발연구소 심포지엄(1976년 6월)에서 ‘도서지역의 입지적 특질과 산업개발전략’이란 논문으로 발표한다. 우리나라 도서개발 문제를 지적한 최초 논문이었다. 1981년 출간된 ‘한국어업경제사연구: 어업공동체’는 어촌연구의 집대성이었다. 책 출간은 교수님을 우리나라 어업공동체 연구의 제1인자로 등극시킨다. 한국경제학회상(1983), 다산경제학상(1987), 금호학술상(1993) 등 많은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평생 한국 어촌경제사 연구에 천착(穿鑿)했던 교수님은 진정한 학자였다.

필자는 교수님 제자는 아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교수님 강의를 직접 들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교수님은 필자를 애(愛)제자로 대했다. 필자가 중앙과 지방의 지역발전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던 시절 많은 조언을 주셨다. 무엇보다 ‘지방인의 시각’과 ‘지역발전’을 필자에게 강조했다. 그러니 필자는 교수님의 총애를 받는 제자이면서 후학(後學)이었고 관심사가 비슷한 동학(同學)이었다.

교수님은 선비처럼 단아한 진정한 학자였다. 필자 우상이었다. 필자는 그런 교수님을 사은(謝恩)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던 법정스님을 천국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박광순 교수님을 그려본다.

*고인이 되신 박광순 교수는 2021년 6월19일 영면했고, 22일 본인의 영원한 고향이었던 영암군 서호면 태평마을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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