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논개(朱論介)와 의기사(義妓祠) / 오수열
2021년 09월 12일(일) 19:50
오수열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광주유학대학 학장
필자는 원래 중국정치를 공부하고 가르쳐 왔는데 해방직후 조선대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한 월파(月波) 서민호(徐珉濠) 선생에 관한 글을 한편 쓴 것이 계기가 되어 호남지역의 ‘근현대정치인물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틈틈이 쓴 글들이 후일에 ‘시대를 밝힌 호남의 정치선각자’(도서출판 이경, 2017)로 간행된 바 있다.

이 무렵 부산에서 발간되는 ‘인간과 문화’라는 잡지에서 영·호남 간 이해증진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남의 인물들에 관한 글을 연재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흔쾌히 응하여 적지 않는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시 국난극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호남의 의병장들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고, 그 가운데 화순(和順) 출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장군에 관한 글이 포함되어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최경회 장군의 생애와 활약상에 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며, 필자가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로 보아 엄연히 한 남자의 소실(小室)로 순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생(妓生)으로 취급되고 있는 주논개(朱論介)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오래전 진주의 경상대학교에서 개최된 학술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진주성(晉州城)과 함께 촉석루와 의암(義巖) 그리고 의기사(義妓祠)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서도 의암은 기생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로, 의기사는 그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민들이 건립한 사당으로 표현되었고 필자 또한 “그런가 보다”하고 무덤덤하게 받아 들였다.

그런데 최경회 장군에 관한 글을 쓰면서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서, 그와 관련되어 반드시 바로잡아져야할 부분이 그의 소실로 제2차 진주성 전투 후 순절한 ‘주논개’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무리 조선조 사회가 반상(班常)의 구별과 함께 정실(正室)과 측실(側室)간의 차별이 심했다 할지라도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진주까지 달려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조선여인의 충절을 실천한 여인을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생의 신분으로 얽매여 놓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기록이 분명한 경우가 있고 기록이 분명하지 않거나 있는 기록마저도 그 정확한 고증이 쉽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어떤 의도하에 쓰여진 기록 보다는 민간사회에서 구전(口傳) 되어 온 내용들이 훨씬 사실(事實)에 부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논개의 생장(生長)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고증들이 이루어졌고, 다만 그녀가 정말 기생이었는지, 아니면 남편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기생의 신분을 취하였는지만이 아직까지도 입장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상황논리’를 중시하며,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 그 본질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먼저 주논개가 이미 1846년(憲宗 12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세운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에 의해 그 생장(生長)이 확인되었고 해주최씨(海州崔氏) 가문에 의해서도 최경회 장군의 측실인 것으로 인정된 이상 그녀의 출생과 성장을 의심하거나 ‘생계를 위해 기녀가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가 왜군의 ‘진주성전투 승전연회’에 참석한 것은 나름의 어떤 목적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당시 조선 여인들이 지녔던 지아비에 대한 정렬(貞烈)에 비추어 볼 때 남편 최경회 장군의 복수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혀 무리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 조정(朝廷)과 유림사회에서는 아녀자 특히 소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논개에 대한 표창에 인색하였고, 뒤늦게 진주성민(晉州城民)들의 청원에 의해 사당을 건립하면서도 일개 ‘야담’(野談)에 바탕하여 그 신분을 기생으로 격하시켜 의기사(義妓祠)라고 편액 했으니 참으로 졸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주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에서 태어났고,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의 최경회의 아내가 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시(晉州市)에서 순절한 여인이다.

최경회 장군은 어떠하였는가. 왜군의 총공세로 진주성이 위급에 처함에 그가 진주로 출병하려할 때 막료들이 만류하자 “전라도도 우리 땅이요, 경상도도 우리 땅 아닌가 의(義)로써 일어난 우리들이 어찌 원근(遠近)을 가리겠는가”라 며 출진했던 사람이다.

필자가 ‘인간과 문화’ 제15호(2016)에 게재한 글에서 “꽃다운 나이에 그 삶을 나라에 바친 논개가 기녀(妓女)가 아닌 의부인(義夫人)으로 그 행적이 바로 잡아지고, 의기사(義妓祠)가 의부인사(義夫人祠)로 정정되도록 영남의 지식인들이 노력해 달라”고 호소했던 바가 아직까지 실현되고 있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호남의 지식인들과 유림(儒林)들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앞장 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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