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벌초사가 사라진다면 / 천세진
2021년 09월 13일(월) 19:56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인간의 문화적 사유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사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등의 모든 추상적인 문명적 구조물은 사물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다. ‘공간’이라 부르는 구성체에 사물들이 ‘자리 잡기’를 하면,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개입하고, 그 진경(珍景)을 관람하거나 개입하는 관객이자 참여자로서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인간 없이도 공간과 시간은 오롯이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은 공간과 시간 없이는 어떤 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유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공간, 시간과 함께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내는 삼위일체임은 분명하지만, 가장 약한 세 번째 고리에 해당한다. 오만하고, 아둔하며, 쉽게 흔들리고, 빠르게 잊는다. 그 결점 덕분에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하니 고마운 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전주의 ‘비사벌초사’이야기를 좀 하려고 서두를 길게 꺼냈다. 전주 한옥마을 옆 동네에 있는 ‘비사벌초사’는 항일시인이자 목가시인으로 불리는 신석정(1907-1974) 시인이 1961년부터 여생을 보낸 집이다. 신석정 시인은 이 집에서 ‘산의 서곡’, ‘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펴냈다. 지금은 신석정 시인 가족과 인연이 있던 분이 매입하여 찻집을 하며 고택을 보존하려 애쓰고 있다.

그런 비사벌초사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재개발사업추진위 측에서는 찻집을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의 대문호들이나 예술가들의 집 가운데에도 집 그대로 있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그런 이유로 문화적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공간을 유지하는 비용은 온전히 개인의 부담이다. 그동안 개인이 부담해야 했던 고충을 이해하지 않고 찻집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지킬 이유가 없다는 주장은 옹색하다.

재개발추진위원회 측에서는 집을 그대로 다른 자리로 옮기는 방안도 제시했다고 한다. 다른 공간으로 옮기면, 마당에 자라고 있는 수십 년 묵은 거대한 태산목을 비롯한 나무들과 비사벌초사를 구성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 옮겨질 수 있을지 의문이고, 다른 공간으로 옮겨진 비사벌초사의 문화적 가치가 옮겨진 곳에서 온전히 살아날지는 더더욱 의문이다.

특별한 의미가 스미고, 문화가 만들어진 공간은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문화공간이 지닌 문화적 가치의 한 축은 바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모든 공간은 인간의 욕망, 의지,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끝내 비사벌초사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 동의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문화 공간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줄 몰랐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사라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문학과 예술 지망생들이 거장들에게 “시(음악, 예술)가 뭐예요?”라고 질문할 때 주어지는 가장 명쾌하고 진지한 대답은 “그것은 삶이다”라는 답이다. 그렇다, 가장 가치 있는 문화는 삶의 공간에 깃든 문화다. 전시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문화의 전부가 아니다. 삶의 모든 장르에, 생을 영위한 공간 모두에 문화와 예술이 존재한다. 삶 속에 서정을 담으려는 이들이 오래된 삶의 공간들인 노포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파트도 사람 사는 공간이니 삶이고 문화다”라고 말할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일하고 균일한 복제물이 수직으로 쌓인 콘크리트 공간에 밀어 넣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삶의 근원적인 욕구의 본질은 아니다. 문화와 예술이 스민 공간을 오래도록 지키고, 즐기고,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근원적인 본질이다.

자본적 욕망에 굴복하여 문화공간을 밀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 문화적 상상력을 말하지만, 상상력은 공간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공간적 근원 없는 상상력은 공허하고 오래 유지되지도 않는다. 공간과 사물과 어우러진 상상력만이 시간의 산맥을 타고 길게 이어질 수 있다. 부디, 지키는 것부터 하시라. 비사벌초사와 주변을 작은 공원으로 만들어 유지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고,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을지 모르니 시간을 더 갖고 고민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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